문화



[하도겸 칼럼]법고창신하는 한류 다기(茶器)의 미래

하도겸 박사의 ‘차담(茶談) : 차 이야기’ <16>

몽골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덩이차’를 그만 만들고 산차(散茶 : 요즘 녹차 같은 잎차) 형태로 만들어서 우려 마시게 했던 사람이 명태조 주원장(明太祖 朱元璋)이다. 서민정책의 하나라지만, 결국 호시탐탐 만리장성을 넘어올지 모르는 몽골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기동성을 가진 유목민족인 몽골군의 재충전과 고향의 향수를 전해주던 것은 역시 차마고도를 넘나들던 덩이차였다. 덩이차 만드는 기술이 없던 몽골인들에게 엄청난 부피로 늘어난 산차는 그림의 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산차(잎차)의 등장은 차를 우리는 도구로서의 차호(茶壺)를 비롯한 차구(茶具)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역경은 기회가 된다더니 차호라는 다기를 만드는 도예가들은 정말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중국인들이 ‘차구 가운데 왕’(茶具之王)으로 여기는 자사차호(紫砂茶壺) 역시 남송시대에 시작돼 명대 중후기가 돼서야 주목받게 된다. 300여 년의 걸쳐 진화를 거듭한 다기들은 점차 오늘날과 같은 차 문화를 이루는데 큰 몫을 한다.

보이차는 30년은 묵어야 제맛을 낸다. 아무리 제대로 된 숙차를 만들어서 노차의 맛을 낸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발효의 속도를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건드린 것은 아닐까? 흉내를 내서라도 그 ‘맛’을 보고 싶어하는 인간 욕망의 속살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맛’을 아는 서민들에게 보이차의 유행은 재앙과 같을 것이다. 싼 가격에 더는 30년 이상의 진년(陳年) 또는 진기(陳期)를 가진 노차(老茶)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가 되어 나온 것이 숙차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이라도 몇백만 원, 몇천만 원을 내면 구할 수 있겠지만, 차가 정말 필요한 것은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다. 

이젠 그 숙차마저도 오래된 것은 먹기 어렵게 됐다. 사치나 호사를 부리지 않고도 보이차와 같은 맛과 효능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해답은 언제나 질문 속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의 실마리는 역사 속에 있다. 지유명차의 박현 회장은 성리학의 대가 남송(南宋)대 주희(朱熹)즉 주자가 살았던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는 경치 좋은 곳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우이암차에 주목했다. 하늘기둥인 천주(天柱)가 있는 전북 진안 마이산(馬耳山)처럼 중국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아홉 구비 무이구곡에는 주자가 봤을 붉은 하늘기둥이 있는 듯하다. 그 기둥을 통해 하늘이 대지에게 선물한 것이 우이암차가 아닐까?

주인은 만든 이들이 아니다. 현재 사거나 얻어서 가지고 사용하는 사람들, 문화 향유자가 주인이다. 21세기 글로벌시대는 보이차를 비롯한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서 생산된 차라도 우리가 마시며 그 문화를 누리면 우리 차임을 말해준다. 잠시 중국이라는 나라가 소수민족이 사는 윈난성을 영유하고 있을 뿐이다. 국경이라든가 영토의 개념은 제국주의 이래 현대자본주의의 소산일 뿐이다. 문화는 그러한 경계에 제한되지 않는다. 보이차를 비롯한 모든 차는 우리 차인(茶人)들의 차 문화로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문화를 선도해 갔던 우리 문화가 어느덧 그 주도권을 잃어버린 듯하다. 아니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우리가 보이차 등 소수민족의 차를 영토개념에 의존해서 중국의 문화라고 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주도권은 사라진다. 고구려의 유민 또는 후예라는 소수민족을 중국이라는 틀 안에 가두는 이들이 적지 않다. 차 문화의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중국의 차 시장은 개방을 통해 어느덧 우리를 앞서가려고 용을 쓰고 있다. 비우고 받아들여야 고치고 바뀌며 나아갈 수 있다.

차 문화는 생활문화다. 일부 계층이나 계급 또는 신분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누구나 한잔 한잔 하루에 언제나 손쉽게 마실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완(茶碗)만을 고집하는 도예가들이 있다면 이미 그 설 자리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못 쫓아가는 이들은 도태된다. 예술작품이든 생활품이든 모든 물질은 이제 그 가치를 시장이 판단한다.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이 사용돼야 진정한 다기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차 생활과 동떨어진 다기는 이제 만들어지는 즉시 폐기되는 불용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국내 차 시장이 중국과 비슷해졌다는 사실도 한국 다기의 현실 적응을 재촉한다. 말차와 녹차 이외에도 보이차와 우롱차, 홍차를 마시는 인구가 많아졌다. 직장이나 공부방에서 편하게 차를 마시는 인구도 늘었다. 소비자가 찾는 차 도구 패턴이 달라진 셈이다. 새로운 차, 다양한 차라는 새로운 생활패턴을 가진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도 하다. 차 마시기에 쉬운 다기, 편리성이 있는 다기, 지금 우리에게, 아니 내게 맞는 그런 다기를 만들어줄 도예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고민을 일찍부터 해온 한중도자문화교류센터(교류센터) 서해진 대표는 24부터 3월1일까지 서울 창덕궁 돈화문 맞은편 한국문화정품관에서 한국 도자기의 한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서 대표는 ‘차와 어울리고, 차 생활과 어울리는 차 도구, 여기에 한국적인 그리고 작가의 개성을 담은 차 도구’라는 모토로 한국 다기의 또 다른 한류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을 만들고자 한다. 바탕을 다지고 내외로 개방적일 때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2015 한국 생활다기 명품전’은 한국 다기의 새 지평을 열어갈 전초전으로 40여 명의 작가가 모인다. 이번 전시회는 박종훈, 신현철, 이복규, 김갑순, 김억주 등 다기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배 작가들을 중심으로 중국시장을 경험했던 작가와 신예 작가들이 두루 참가한다. 동시에 한중교류단체와 차도구평론가들의 중국 차 박람회 경험과 차 도구 시장에 대한 이야기 마당도 개최한다. 

‘차이나’가 본래 도자기를 가리키듯 중국은 도자기의 나라로 불린다. 일상에서 도자기를 쓰는 정도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중국정부는 도자기를 ‘2.5산업 군’으로 분류하며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제조업이면서 서비스업으로 특화해 공예품과 예술품으로 발전할 여지를 넓혀주는 것이다. 서해진 대표는 이번 전시를 열게 된 의도를 중국인들의 생활 속에 자리한 한류의 흐름을 타고 가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중국인들이 한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의복과 화장품을 선호한다면 얼마든지 차 문화에서도 한국 다기를 선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2년 사이 중국 차 박람회에 참가하는 한국 도자 작가들이 늘었다. 그런데 2013년부터 베이징과 광저우 그리고 선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참가했던 한국 도자기 상황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힘들어졌다. 작년 12월 선전에서는 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왜 그렇게 됐을까? 현재 중국 시장에 적극적인 장기덕 작가(청봉요 대표)는 중국 시장은 전쟁터와 같은데 너무 계획 없이 참가했다고 말한다. 중국 소비자들의 차 생활 패턴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고, 판매 방식이나 계약과 관련한 가격정책, 인테리어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중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차와 어울리고, 차 생활과 어울리는 차 도구, 한국적인 그리고 작가의 개성을 담은 차 도구가 한국 다기의 또 다른 한류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이를 다지고 내외로 개방적으로 나갈 때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먼저 현지에 적응하고 있는 작가들이 들려주는 경험담이기도 하다. 

전시 기간 한국문화정품관은 무척 바쁘다. 2월 8일까지 이싱자사 1창(1958~1997)의 근간이 됐던 청말민초 작품과 1997년 민영화 직전까지의 자사1창 작품 300여 점을 모은 자사풍운 - 이싱자사 반세기전도 함께 열린다. 1층과 2층은 ‘한국 생활다기 명품전’, 3층에선 ‘자사풍운-이싱자사 반세기전’, 4층 TEA Cafe ‘오래된 미래’에서는 ‘신예 도예작가 릴레이전’이 진행된다. 

** 이 글은 차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필자를 비롯한 일부 전문가들의 이해나 주장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이는 일방의 의견일 뿐 다른 해석도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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