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임선혜(38)는 고음악계의 한류스타로 통한다. 고음악은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원전 음악 또는 정격 음악으로도 이야기된다.
"언젠가부터 앙상블이 커지기 시작했잖아요. 사람들에게 큰 사운드를 줘 좋은 의미로서의 자극을 주는 식으로 발전했죠. 그러다 사람들이 역으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원전 음악 운동이 시작됐어요. 소리를 크게 내는 게 아니라 가사를 들을 수 있게, 연주자들의 소통이 들리게 해보자는 생각이죠. 좋은 음식을 조금씩 먹어본다는 생각으로 들으시면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실 거에요."
임선혜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뒤 1998년 23세 때 독일 정부 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칼스루에 국립음대에서 유학했다. 유학 초기 음악뿐 아니라 현지인들이 손가락으로 숫자 세는 모습까지 살피는 등 현지 적응을 위해 노력했다.
노력은 고음악계의 거장인 벨기에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67)에게 발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임선혜는 유럽 고음악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투명하고 서정적인 음색과 변화무쌍하고 당찬 연기력으로 꾸준히 거장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문화적 배경 등 여러 차이점으로 계약서가 파기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임선혜는 동양인인데 여기서 태어나 자란 애 같다'는 소리를 들어요. 동양인의 외형으로 무대에 올라가면 더 튀잖아요. 그런 걸 이용하게 되기까지 15년이 걸렸네요."
데뷔 후 15년을 삼분할 해 바라본다. 갓 데뷔했을 시기, 쏟아지는 일에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지냈던 시기를 지나 주도적으로 앞으로 15년의 음악 길을 그리고자 하는 지금이다.
"사람들이 많이 아는 노래를 하면 안 되느냐는 소리도 많이 듣는데 그런 노래는 저보다 잘하는 분들이 많아요. 대신 저는 고음악을 하면서 느낀 독특한 매력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감 같은 게 있어요. 낯선 노래지만 제가 부르면 공감되는, 덜 낯설게 들리는 그런 음악을 하고 싶어요."
10일 레이블 아르모니아 문디를 통해 발매된 첫 독집 음반 '오르페우스-이탈리아와 프랑스 칸타타들'은 임선혜의 앞으로 15년 음악 길의 이정표다. 이 레이블에서 아시아 성악가가 독집 음반을 내는 건 임선혜가 처음이다.
"음반이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나왔다는 거에 자부심이 있어요. 스타를 만들기 위한 음반사가 아니거든요. 스타가 되려면 이런 음반을 내면 안 되죠.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뷔 15년 차인 제가 지켜온 음악적 자존심을 담았죠."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가 함께 참여한 이번 음반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신화를 주제로 내세웠다.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부르면 야수나 생명이 없는 바위마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신화 속 가수다. 에우리디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의 아내다.
"음반의 특징이 '오르페우스'를 주제로 골랐다는 거죠. 신화이긴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남자거든요. 사랑에 빠진 남자를 여자가 노래하는 거죠.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저도 궁금했어요. 가사를 보면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어요. 그걸 소프라노가 노래할 수 있게 쓴 작곡가의 의도도 신기했죠."
프랑스, 독일의 대표적인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이 작곡한 소프라노를 위한 솔로 칸타타들을 담았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1710~1736), 루이 니컬러스 클레랑보(1676~1749),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 장 필리프 라모(1683~1764)의 곡을 신화의 줄기에 따라 배치한 것도 특징이다.
앨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곡으로는 16번 트랙, 장 필리프 라모의 '오르페' 중 '사랑이여, 네가 이 죄를 저지르게 하는구나'를 꼽았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사랑, 네 탓이다'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사랑 때문에 내가 죄를 저질렀다고 부르짖으면서 저도 굉장히 통쾌한 면이 있었죠. 남자들은 이런 사랑을 하는구나 상상하면서 노래해 재미있었어요."
앞서 임선혜는 2008년 초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슈가 안무한 크리스토프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를 공연하기도 했다. '오르페오'는 오르페우스 전설을 소재로 작곡한 오페라의 제명(題名)이다.
임선혜는 오페라를 통해 사랑의 신 '아모르'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지만, '오르페오'로 노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남자의 감성을 노래한다는 게 큰 매력이었어요. 그동안 '오르페오'를 한 적이 없었는데 음반을 통해 드디어 '오르페오'를 해보게 됐어요. 내년에 오케스트라와 내한하게 되면 용기를 내 그 곡을 불러보고 '오르페오' 전체를 불러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