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엔/ 우산도 소용없네/ 가슴부터 젖으니까// 우수수 지는 나뭇잎엔/ 빗자루도 별수 없네/ 가슴 속 낙엽들은/ 그대로 있으니까// 이처럼 속절없이 가을은 가지만/ 타오르는 단풍잎처럼 그리움은 남아/ 아득한 하늘 자락까지 사무치다가/ 시나브로 빗물 되어/ 소슬비로 내리네."(17쪽 '소슬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가을레슨' '밤의 편지' '추억만나기' '혼자 젖는 시간의 팡세' 등의 시집을 펴낸 채희문(76) 시인이 '소슬비'에 젖어 쓴 시 100편을 엮었다. 시인이 가만히 오래 바라본 풍경이다.
"요즘 하는 일은/ 주로 바라보는 일// 미워하거나 화내지도 않고/ 탓하거나 서운해하지도 않고/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좀 뒤로 물러서서/ 바보처럼 바라보거나/ 그저 듣기만 하는 일// 아니면 가을 밤에 가랑잎 굴러가듯/ 덧없이 떠나가는 것들을 향해/ 사랑과 연민의 눈길로/ 용서와 감사의 미소로/ 석별의 손을 흔들어 주는 일."(23쪽 '요즘 일과')
2007년 볼펜으로 눌러 쓴 육필 시집을 출간한 데 이어 이번에는 붓을 들었다. 작가는 이 경험을 "그동안 나도 모르게 경직되고 타성화된 일상의 메마른 감성이 한결 순화되고 정화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며 추천하기도 했다.
"구름아 구름아/ 서산마루에 쉬어가는/ 꽃 구름아/ 잠시만 머물다가/ 나를 태워다오// 흘러가는 물결처럼/ 바람결에 떠가는/ 하늘 바닷길/ 어느 교통수단으로도 갈 수 없는/ 머나먼 아득한 길/ 아름다운 그곳으로"(116쪽 '구름꽃 돛단배' 중)
"앞으로 남은 길도 '가슴으로 쓰고 가슴으로 읽는 시'를 생각하며 걸어가련다"는 시인의 길에는 온기를 품은 낙엽과 천천히 내리는 가을비가 있다. 130쪽, 1만5000원, 황금마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