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윤치호 애국가 작사자·안창호 애국가 개선자"

윤치호(1865~1945)의 '애국가 작사'설에 힘을 싣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2일 오후 서울 견지동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박물관에서 열린 'SBS 그것이알고싶다, 윤치호 자필 가사지 국내 보존 문제와 애국가 작사 사실 대토론회'에서 발제한 '애국가 작사에 대한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검증'에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증거를 거듭 밝혔다.

특히 미주 한인 사회의 항일민족신문 '국민보' 1953년·1958년 기사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다. 이 두 기사는 '애국가를 안창호가 개선했다'는 논조를 띠고 있다.

국민보는 국민회(國民會)가 발행한 신문이다. 국민회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이승만·안창호 등이 창설한 미국 내 재미 한인교포 독립운동단체다.

국민보는 1958년 4월9일 자에서 안창호의 애국가 개선에 대해 '국민회 당시 최정익과 안창호의 제안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정됐다'고 보도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최정익은 1905년 공립협회에서 안창호와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최정익과 안창호의 애국가 개선은 1909년부터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국민회 시절의 절대연대로 친다 해도 최정익과 안창호의 애국가 개선은 1909년이 된다"면서 "현 애국가가 찬미가에 수록, 재판이 출판된 1908년 이후가 됨으로써 최창익이든 안창호든 작사자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 기사를 신뢰한다고 하면 세 곳을 안창호가 개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김 이사는 다른 언론의 보도를 인용, 이 두 기사를 '애국가 탄생 과정에 대해 비교적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평가한다'면 네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하나는 '안창호 작사설'이 아니고, '안창호개작(개선)설'이다. 두 번째는 개작(개선)한 부분은 세 곳으로 자구 수정이다. 세 번째는 신한민보의 국민가 발표든, 국민보의 '국민회개선' 시기든 모두 찬미가 발행 이후다. 그러므로 찬미가가 기준이 돼야 한다. 네 번째는 찬미가 14장과 국민가와의 차이가 확인되는 곳은 한 곳이고, 현 애국가와 차이는 세 곳이다. 이 결과 신한민보 국민가 발표를 1차 개선, 임시정부에서 현 애국가로의 개선을 2차 개선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찬미가는 윤치호가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해 1907년 번역해서 펴낸 노래집이다. 15곡의 찬송가가 수록됐는데 그중 14장에 현행 애국가가 실려 있다.

김 이사는 "두 기사는 1910년 신한민보의 국민가 발표를 안창호의 기지로 보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서 "그러므로 윤치호가 작사가라는 사실을 일면 안창호가 입증시켜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바로 안창호의 개작설의 진원을 알려 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윤치호는 1897년 10월12일 칭제건원을 기념해 찬미가 제1장, 1897년 8월13일 개국 505주년을 기념해 찬미가 제10장, 1906년 한영서원 개교로 학생들과 함께 부를 새로운 애국 찬미가의 필요성에 의해 1907년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를 작사했다"면서 "이후 안창호 등의 자구(字句) 수정이 있게 되고 이들의 사랑으로 확산, 3·1 운동 기간에 민중이 선택돼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회는 지난달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 애국가 공동작 설이나 안창호 설을 주장한 이들을 상대로 김 이사와 혜문 스님 등이 공개 토론을 제안하면서 마련됐다. 그러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이들은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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