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추진 중인 상고법원 설립 법안에 대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 16명 가운데 절반인 8명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이들 대부분은 상고절차 개선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상고법원 설치가 최선의 방안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결국 하급심 강화 방안, 대법관 수 줄이기 등 구체적인 청사진이 함께 제시될 때 상고법원 설치안에 대한 공감대 또한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상고법원 설치로 대법관 숫자 줄일 수 있나
대법원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크고 중요한 사건은 전원합의체 재판으로 심리함으로써 최고법원의 기능을 복원하고, 기존의 법리 적용으로 해결이 가능한 사건들은 상고법원이 신속하게 판단할 경우 국민들에게 효율적인 재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상고법원 반대론자들은 대법원의 업무 적체 현상이 심각하다면 대법관 숫자를 늘리라고 주문한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포함해 14명인 대법관 숫자를 20명 정도만 늘려도 한 해 동안 대법관 1인당 사건수가 3000여건에서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법관 증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급인 대법관을 20명 가까이 늘리는 것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대법관 숫자가 너무 많으면 전원합의체에서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상고법원 설립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도 "대법관 증원은 효율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대한민국 법원 제도 자체를 지나치게 흔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법조계 일각에선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와 함께 대법관 숫자를 9명 정도로 줄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고법원 신설로 상고심을 담당하는 법관 숫자가 30~50명 정도로 늘어나면 그만큼 대법관 숫자를 줄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이유에서다. 상고법원 도입에 찬성 입장을 보인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은 "상고법원이 생기면 대법원의 사건수는 줄어들 것이고 그렇다면 대법관 숫자 역시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며 "대법원이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심(1·2심) 충실화 '필수'
상고법원 설립을 찬성하는 법사위원들조차 사실심 충실화는 필수적인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1·2심 판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려는 노력 없이 상고법원을 도입해봤자 상고사건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게 법사위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많은 국민들이 소송비용과 시간을 감수하고도 삼세번의 판단을 받으려는 이유는 1·2심 판결을 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법원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법원은 1·2심 재판을 강화하기 위해 단독재판장의 50% 이상을 부장판사로 채우고, 고등법원 판사를 경력 15년 이상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법원이 증거 수집을 도와주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본안 심리 이전 증거조사절차)도 도입키로 했다. 재판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의사나 건축사 등 전문가를 심리에 참여시키고 국제거래(서울중앙지법), 증권·금융(서울남부지법), 언론(서울서부지법), 해사(부산지법) 등 특정 분야 사건을 집중 처리하는 특성화법원도 도입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만으로는 하급심을 강화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상고법원 판사 1인당 2명 정도의 재판연구관을 둘 경우 이들은 1, 2심 법원에서 실력 있는 판사들이 차출될 수 밖에 없어 하급심이 오히려 더 약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상고법원 설립을 설득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1·2심 판결이 신뢰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사실심 강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했다.
◇대법관 구성 다양화 '시급'
상고법원 설치안의 전제로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된다. 실제로 1980년부터 지난해까지 임명된 대법관 86명 가운데 70명(81%)이 판사 출신이고, 나머지 16명도 검사 출신 9명을 제외하면 7명이 모두 판사 재직 경험을 가진 변호사나 법학교수 출신이다.
상고법원 도입으로 대법원에 오는 사건수가 줄어들면 전원합의체 판결을 대폭 늘릴 수 있다는 대법원의 입장도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공감을 얻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다. 상고법원 설치에 유보적인 의견을 밝힌 새정치민주연합 이춘석 의원은 "사실심을 강화하는 방안이 먼저 마련돼야 하고 대법관의 50%를 다른 직역이나 분야의 인물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하는 것을 전제로 (상고법원 설치를) 조건부 찬성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정책법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전원합의체 판결 비율을 높이고 통일된 법령해석과 법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정책법원 기능을 담당하겠다는 게 대법원의 목표다. 이를 위해 상고법원과 업무를 분담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선 대법원이 자신들의 업무는 줄이면서 권위는 보장받으려는 게 아니냐고 지적한다. 상고법원 재판부가 헌법에 반하거나 대법원 판례와 다른 선고를 하면 '특별상고' 사유로 인정돼 대법원이 다시 사건을 심리할 수 있는 만큼 사실상 4심제가 되므로, 국민 부담이 늘어나는 동시에 대법원의 업무경감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특별상고를 허용하지 않게 되면 상고법원에서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판단을 내릴 경우 통제가 안 될 수 있다"며 "특별상고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실제 특별상고로 이어질 사건수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법원이 상고심 사건을 상고법원에 보낼지 아니면 대법원에서 심리할지를 결정하는 첫 번째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충실하게 판단할 것"이라며 "전원합의체 판결이 많아질수록 정책법원으로서의 기능 역시 강화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