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티아나' 강수진(48)이 '오네긴'의 러브레터를 매몰차게 찢어버린다. 그리고 11년 전처럼 이번에도 오열한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커튼콜에서 '강철나비'로 통하는 강수진은 이내 활짝 웃었다. 연약해 보이면서도 단단함과 당당함으로 무장한 그녀다.
6일 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열린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내한공연 전막 발레 '오네긴'에서 활약한 강수진에게 4층을 가득 메운 2300명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약 8분간 이어진 환호와 박수에 강수진은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끊임없이 웃는 얼굴로 내내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며 관객에게 '뜨거운 안녕'을 보냈다.
커튼이 완전히 닫힌 뒤 관객이 객석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그 뒤에서는 강수진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연이 끝난 뒤 수많은 붉은 장미가 담긴 양동이가 강수진 옆에 놓여 있었다.
강수진은 2016년 남편 툰치 소크멘(52)의 생일인 7월2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오네긴' 공연을 끝으로 실질적인 은퇴를 하게 된다. 그는 이 발레단의 종신 단원이다. 내년은 강수진이 1986년 19세 나이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 무용수로 입단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앞서 이날부터 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오네긴'을 끝으로 한국 현역 무대에서 먼저 은퇴한다.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통하는 '오네긴'은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남자 오네긴과 순진한 소녀 타티아나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러시아 문호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이 원작이다.
'녹턴' '사계'와 같은 차이콥스키 음악으로 발레에 서정성을 더했다. 드라마 발레의 창시자 존 크랑코가 3막6장의 발레로 재탄생시켰다. '카멜리아 레이디' '로미오와 줄리엣' 등과 함께 강수진 드라마 발레를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날 역시 연기와 기술 면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강수진의 명불허전 타티아나를 만났다. 몇 년 더 거뜬히 활약할 수 있을 만큼 기술적인 면이 완벽했다.
턴 동작과 다른 발레에 비해 다소 낯선 팔 동작은 물론, 오네긴 역의 제이슨 레일리와 호흡을 맞춘 몇 차례의 파드되(2인무)는 마치 예술작품 같았다. 특히 그의 몸에 의지해 공중으로 솟아오를 때 깃털 같다는 진부한 수식은, 펄떡거리는 실체가 됐다.
더 절정인 건 감정연기다.1막에서 오네긴에게 단숨에 반한 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순진한 처녀의 모습은 그녀의 나이를 무색게 했다. 눈앞에서 오네긴이 자신의 러브레터를 찢어버린 걸 목격한 뒤 혼란에 빠지는 2막은 비련의 여주인공, 그 모습 그대로였다. 품위 있는 공작 부인에서 뒤늦게 후회하는 오네긴에게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이내 그를 거절하는, 감정 변화가 격변하는 3장에서 드라마틱 발레의 전범을 봤다.
이처럼 2004년 이후 처음 한국에 선보인 '오네긴'에서 그동안 더 무르익은 강수진의 감정 연기는, 발레가 기술로만 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래서 강수진의 은퇴 무대가 아쉬웠지만, 그렇기에 더욱 대단해 보였다. 가장 아름다울 때 떠나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는 "지금까지 공연마다 최선을 다해서 후회가 없다. 이번 공연도 마찬가지"라며 한국에서의 마지막 무대를 슬픈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내내 중력을 무시하며 공중으로 솟구친 강수진이 더 가벼워 보였던 이유다. 이제 더는 발레리나 강수진을 볼 수 없지만, 국립발레단 단장 강수진으로서 본연의 역할에 더 충실한 그가 듬직하게도 보인다.
평소 강수진 팬이나 그의 전막 발레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직장인 박미진(25·서울)씨는 "이번이 아니면 강수진 단장의 무대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면서 "마지막 장면에 편지를 찢고 오열을 할 때 전율이 일더라.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셔서 기쁘다"고 흡족해했다.
3회차 공연 약 7000석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혹시나 나올지도 모를 취소 표 또는 공연 당일 일부 시야 제한석을 오픈하면 그나마 예매 가능하다. 5만~28만원. 크레디아 클럽발코니.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