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기담'과 '비포 애프터'는 연극의 존재 가치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한국과 일본의 극작가와 연출가가 협업한 '태풍기담'은 양국의 지난한 과거사, '비포 애프터'는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흔든 '세월호 참사' 전후를 다룬다. 두 작품은 형식과 내용이 극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오롯이 껴안으며 연극의 역할에 대해 고민케 한다.
◇'태풍기담', 내용도 형식도 작업과정도 소통
한·일 수교 50주년인 데다가 한일정상이 만난 때 무대에 오른 '태풍기담'은 내용, 형식, 그리고 작업 과정의 성격이 일치한다. 그것은 '소통'이다.
조선의 황제였던 이태황은 나라를 빼앗긴 뒤 딸 소은과 함께 남중국해의 외딴 섬에 살고 있다. 이태황이 일으킨 태풍으로 인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된 일본 귀족이 이곳에 오게 된다. 조선을 멸망시킨 귀족 중 한 명인 사이다이지 카네야스 일행이다.
하지만 소은과 카네야스 아들 사이다이지 나루야스는 두 나라의 갈등 밖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에게는 지나간 역사보다 현재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소통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며, 소통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이를 표현하는 형식이 기발하다. 소은과 나루야스가 나누는 필담이 그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 글로 대화를 나눌 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예컨대 태풍은 두 나라 모두 한자 '台風'으로 표현한다. 소은이 '태풍', 나루야스가 '타이후'라 거듭 말해도 통하지 않지만 台風이라고 쓰는 순간 통한다. 다른 나라지만, 같은 문화권에서 비슷한 영향을 받은 두 나라의 모습이 겹쳐진다.
두 젊은 작가의 결합으로써 가능했다. 한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 성기웅(41·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대표)과 동아연극상 최초 외국인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 연출가 다다 준노스케(39·극단 도쿄데쓰락 대표)가 주인공이다. 2008년 아시아연출가워크숍을 계기로 '로미오와 줄리엣'과 '가모메' 등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이다.
이처럼 내용·형식·작업 과정에서 소통의 흔적이 묻어남에도 막판에 쉽게 화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더 높게 살 만하다. 양국의 가족과 일행, 이태황이 노예처럼 부린 섬의 원주민 얀꿀리의 권력관계가 태풍처럼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이 뒤섞이는 순간, 과거와 화해하지 못한 양국의 현재 모습이 오버랩된다. 한국어, 일본어, 섬나라 언어가 마구 섞이며 혼란을 자아내는 마지막 부분이 추측을 짙게 한다.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템페스트'가 원작이다. 전쟁을 벌이던 밀라노와 나폴리를 배경으로 복수와 화해 그리고 용서를 그린 것이 원작인데 '태풍기담'이 배경으로 삼은 1920년대 동아시아는 절로 제국 언어의 힘과 권력에 대한 질문까지 보탠다.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안산문화예술의전당·일본 후지미시민문화회관이 공동 제작했다. 남산예술센터가 시도하는 국제교류 프로젝트의 첫 사례로 양국 공공극장이 함께 참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진척이 없지만 역사를 기억하되 소통을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는 명분을 상기시킨다.
8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이후 '페스티벌 도쿄'를 통해 11월 26~29일 도쿄예술극장에서 선보인 뒤 12월 4~6일 후지미시민문화회관 키라리 후지미에서 피날레를 장식한다. 1만8000~3만원. 남산예술센터. 02-758-2150
◇'비포 애프터', 감성·이성의 날을 동시에 번뜩이게 하다
동시대 사회 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대 온 연출가 이경성(32)의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 신작 연극 '비포 애프터'는 연극성으로 감성, 이성의 날을 동시에 번뜩이게 하는 묘를 발휘한다.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무대 위에서 존재 가치를 위협받는 작품들이 있다는 의혹이 빗발치는 이 때, 세월호를 과감하게 전면에 내세운다.
이 팀의 특징인 다큐멘터리적 무대 언어로 인해 과감성이 다 와닿는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감정적으로 흐르기 쉬운 사건이다. 이러한 무대 언어는 이성의 저울추에 무게를 싣는다. 극장 비상탈출 매뉴얼, 랩, 걸그룹 댄스 등 연극을 환기시키는 것들도 균형추 중 하나다.
결국 감성과 이성의 균형은 연극이 사회를 반영하고, 이를 자각하는 또 다른 거울임을 깨닫게 만든다. 작품 속에도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말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이, 삼촌이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한 뒤 왕위에 대신 올랐다는 심증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의 앞에서 연극을 벌이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를 계속 의인화하시키는 부분도 탁월하다. 실체가 없어 감정이 없는 국가를 감정이 있는 배우가 연기할 때, 감정을 계속 배제하려는 아이러니가 생기는데 이는 국가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설파한다.
국가(의 체제)를 연기하는 장수진을 비롯해 아버지의 죽음을 서서히 목도한 성수연, 친구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꼈던 채군, 눈이 거의 실명될 정도의 국가적 폭력을 경험한 후 무기력증에 빠졌던 장성익, 2014년 4월16일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있던 김다흰과 자신의 일기를 방송하는 나경민을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사건이 개인의 삶과 결코 떨어질 수 없음을 체감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파도 소리가 울려퍼질 때 객석에서 훌쩍임도 울려퍼진다. 세월호의 목적지였던 제주항 인근의 파도소리다. 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육성프로그램 중 하나다. 작·출연 장성익, 나경민, 장수진, 성수연, 채군, 김다흰. 1만~3만원. 두산아트세터. 02-708-5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