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는 큰 귀를 가져야 해요. 첫 번째로 해야하는 건 듣는 거죠. 우선 그것만 생각하고 움직여야합니다. 먼저 듣고 느낀 뒤 그 느낌을 손에 전달해야 하고 그 다음에 손이 움직여야 하는 거죠."
정명훈 예술감독의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이민형의 적극적인 지휘 열기로 수은주가 가파르게 올라가던 4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서울시립교향악단(대표 최흥식·서울시향) 연습실의 온도 균형이 그제야 맞춰졌다.
이날 포디엄 주인공은 정 감독이 아니었다. 2013년 브장송 지휘 콩쿠르의 결선 진출자인 이민형이 긴장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6번 2악장을 지휘했다. 정 감독은 한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담담한 얼굴로 이민형의 지휘를 바라봤다.
서울시향의 '정명훈 예술감독 지휘 마스터클래스' 현장.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한 이 프로그램은 정 감독이 멘토로 나서 후배 지휘자들을 직접 지도하는 자리다.
'서울시향 지휘 마스터클래스 운영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뽑힌 미래가 기대되는 4명의 신진 지휘자들이 30분씩 번갈아 가며 지휘봉을 들었다.
이민형을 비롯해 함부르크 심포니 등을 객원지휘한 문주안, 현재 경상북도 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이동신, 바덴바덴 필하모닉 등을 객원지휘 한 바 있는 데이비드 이(David Yi) 등 국내·외에서 실력을 쌓은 젊은 지휘자들이다. '차세대 지휘자'를 노리는 이들의 열정과 땀으로 서울시향 연습실은 에어컨이 가동됐음에도 2시간여 동안 달아올랐다.
먼저 오케스트라 100명의 소리를 들은 다음 자신의 템포를 찾으라고 조언한 정 감독은 "많은 지휘자들이 이것저것하고 싶어하는데 먼저 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로 영어로 말하고 한국어를 종종 섞어 쓴 정 감독의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들어라"는 요지의 멘토링은 적확했다.
수차례 이민형의 자세를 교정하며 '원 포인트 레슨'을 해준 정 감독은 직접 포디엄에 올라 시연을 하기도 했다. 정 감독의 절제된 지휘에 서울시향의 오케스트라 소리는 한결 드라마틱해졌다.
이민향에 이어 포디엄에 오른 이동신은 베토벤 교향곡 7번 1·2악장을 지휘했다. 정 감독이 이민형에게 건넨 조언을 의식한 듯 듣는 것과 템포를 중요시하는 듯했다.
다만 정 감독은 이동신에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오케스트라가 하는 것을 충분히 듣고 감정을 오케스트라에게 전해야한다"고 주문했다. "너무 지적을 많이해서 오케스트라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끌어내듯, 분위기를 이끌어야 한다"며 감정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기술적으로 안정됐지만 그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이 느기는 감정을 오케스트라에게 전달해야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 클래식 음악가는 모든 것이 세다"며 박자 젓기인 '비팅'을 줄 때는 가볍게 전달해 오케스트라가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도 했다. 단원들을 보는 눈하고 오케스트라 소리를 듣는 귀가 혼동돼 헷갈릴 때가 있는데 템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베토벤 교향곡 6번 1악장·7번 1악장을 지휘한 데이비드 이에게는 지휘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중요성을 연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휘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다운비트에 신호를 줄지 업비트에 신호를 줄지는 지휘자의 선택이나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베토벤 교향곡 7번 1·2악장을 활발하게 지휘한 문주안에게는 각자 지휘방식이 있으니 지휘 스타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며 다만 "최대한 순수하게 음악적으로 접근"(purely musical as possible)하라고 주문했다.
이와 함께 제일 중요한 건 하모니라며 "하모니를 어떻게 이어갈지 결정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지휘자가 제대로 된 결정을 하면, 오케스트라가 함께할 수 있다"고 했다.
포디엄에 오른 직후 기자와 만난 이민형은 "정 선생님이 저를 한번에 파악해주시고 정리해주셨다"며 "귀를 한번에 뚫어주시는 분은 흔치 않은데 제가 여려워할 때 한번에 팁을 주시더라"고 했다. 서울시향 단원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트레이닝이 되고 반응을 해주는 오케스트라와 작업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제 나이에는 불가능하다. 이런 식의 기회를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즐거워했다.
연주에 참가한 단원들도 참가자들 지휘에 대한 의견을 낸다. 정 감독의 평가와 이들 의견을 종합해 추후 이날 마스터 클래스에 대한 평가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그간 서울시향의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거쳐간 교육생들은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현재 서울시향 부지휘자를 맡고 있는 최수열은 2013년 열린 제1회 지휘 마스터클래스 교육생 출신이다. 당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7월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선임됐다. 이날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역시 2013년 참가자인 마카오 출신의 지휘자 리오 쿠오크만(Lio Kuokman)은 마스터클래스 참가 다음 해인 작년 4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발탁됐다. 지난해 지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한 장진(Gene Chang)은 신시네티 심포니의 부지휘자로 올해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향후 차세대 지휘자에게 꾸준한 연주 기회를 제공함은 물론, 서울시향의 지휘자군 확보를 위한 장(場)으로 활용해나갈 계획"이라고 알렸다.
올해 연말 서울시향과 합동공연 논의차 서울을 찾은 도쿄필 관계자들도 참관했다.
한편 감색 헨리넥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 팬츠 차림의 편안한 모습으로 연습실을 찾은 정 감독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예술감독직 사퇴 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는 언급을 꺼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