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 겸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는 긴장감과 웃음이 공존하는 가운데 장장 7시간을 넘기는 마라톤 회의로 진행됐다.
이날 회의에는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 등 62명의 정부 관계자와 경제단체장과 기업인, 소상공인 등 59명을 비롯해 총 16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 전 과정은 TV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됐다.
'확 걷어내는 규제장벽, 도약하는 한국경제'라고 적힌 대형걸개가 걸린 가운데 오후 2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시작한 회의는 밤 9시5분께 종료됐다.
당초 청와대는 종료시각을 정하지 않았지만 4시간 내외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정부의 규제정책에 대한 기업인 및 자영업자들의 하소연과 비판, 전문가들의 진단과 제안, 부처 장관들의 설명과 대책들이 쏟아지며 열기가 고조됐다.
토론 진행을 맡은 김종석 홍익대 교수가 1인당 발언시간이 3분임을 수차례 확인했지만 참석자들에게 '할 말'이 워낙 많았던 탓인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1세션과 2세션의 중간시간인 오후 4시45분께 20분간의 휴식시간 동안 참석자들은 샌드위치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시간 정도로 예정됐던 2세션이 예정보다 길어지자 오후 7시30분께 사회자인 김 교수는 "10분 쉬는 게 어떨까 하는데 양해하느냐"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오신 분들이 그래도 다 말씀을 하셔야 한다. 그냥 진행하는게 나으시겠다"며 회의를 쉬지 않고 이어나갔다.
박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장시간 애쓰셨고 마음 같아서는 저녁이라도 대접을 해드리고 싶은데"라며 "이건 상당히 경우가 빠지는 것 아닌가 해서 제 마음이 불편하다"고 미안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시작부터 '따끔' 질책…"국민 모르는 정책, 무슨 소용 있나"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모두발언 이후 처음 마이크를 잡는 순간부터 정부 부처에 대한 따끔한 충고를 던져 회의장 분위기가 순간 한층 긴장되기도 했다.
모두발언 이후 1세션에서 나온 제품 품질인증과 관련한 이지철 현대기술산업 대표의 건의에 대해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인증 콜센터를 개설했다"며 '1381 콜센터'를 언급하자 박 대통령은 "1381 많이 아시는가"라고 참석자들에게 반문한 뒤 "모르면 없는 정책이나 같다. 국민이 모르면 애쓰신 공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119는 모르는 국민이 없지 않나.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분을 위한 보건복지부의 콜센터가 129인데 인지도가 굉장히 낮아 16%밖에 모른다고 한다"고 예를 들며 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이를 알려야지 모르면 무슨 소용있느냐고 했더니 스티커 같은 걸 만들어 '위험할 때는 119, 힘겨울 때는 129' 이렇게 만들었다"며 "적극 알려야한다"고 충고했다.
이후 윤 장관은 2세션 발언 도중에 "아까 1381 번호가 2주 전에 개통됐다고 했는데 그때 번호를 받은 것이고 이달 26일 개통한다"며 "제가 말씀을 잘못드린 이상 홍보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또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이 선정한 '손톱 밑 가시' 중 90여건이 아직 미해결이라는 송재희 중기중앙회 부회장의 보고에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추진이 제대로 완료가 안되고 있다면 큰 문제다. 관계부처도 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타해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당초 발언이 예정돼 있지 않던 민관합동규제개선전략팀장을 불러 일으켜 실무자 입장에서 현장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생각을 묻기도 했다.
아울러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이 접수된 과제 중 40%가 아직 해결되지 않거나 해결 중에 있으며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도 있다고 보고하자 "손톱 밑 가시라고 선정은 왜 했나. 안되는 것인데"라고 꼬집었다.
◇곳곳에서 '웃음' 터지기도
이날 회의가 박 대통령의 따끔한 질책 속에 시종일관 긴장된 분위속에서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참석자들이 던진 말들로 박 대통령을 비롯해 좌중의 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갈창균 한국외식업중앙회 회장은 음식업계의 규제 관련 애로사항을 설명한 뒤 "규제와 관계가 없지만 조류 인플루엔자(AI) 발생 시 방송국 보도를 자제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살처분 과정을 영상으로 내보내면 어려운 업소가 더 어려워져 매출이 곤두박질 친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그러면서 "살처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대통령께서 방송국에 말씀을 해주셔서 자제해달라고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참석자 가운데 갈비집 사장님으로 관심을 불러모은 김미정 정수원돼지갈비 사장은 인력난으로 재외동포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행정업무로 겪는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외국인 고용절차를 상세히 설명하는 도중 "제가 많이 떨고 있죠"라고 물어 참석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시 재미있는 표현으로 웃음을 자아냈지만 뒤이어 나온 박 대통령의 강도 높은 발언으로 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유 장관은 관광, 콘텐츠, 게임 산업 등의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지금 저희도 정말 미치겠다. 우리 사회가 너무 근엄하고 학습 중심적이고 생산 중심적이다 보니까 저희 부가 관장하고 있는 분야는 다 척결돼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또 유 장관은 "저도 노력하고 다른 부처에서도 적극 노력할 수 있도록 대통령께서 '콱콱' 압력을 넣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해 다른 참석자들을 다시 미소짓게 만들었지만 정작 박 대통령은 "시대와 현실에도 안 맞는 편견으로 인해 청년들이 많이 취직할 수 있는 일자리를 다 막고 있는 것은 거의 '죄악'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해 멋쩍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날 회의에는 스콧 와이트먼 주한영국대사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와이트먼 대사는 영국의 규제개선 제도를 설명했는데 인사말과 마무리 발언을 한국어로 읽었다.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 실력이었지만 또박또박 읽으려고 노력하는 와이트먼 대사의 모습에 박 대통령은 미소를 지었고 참석자들은 뜨거운 박수로 호응했다.
◇드라마 '별그대' 인용 화제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 앞선 모두발언에서 최근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별그대)'를 간접적으로 인용해 화제를 모았다.
박 대통령은 "최근 방영된 우리나라 드라마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다"면서 "이 드라마를 본 수많은 중국 시청자들이 극중 주인공들이 입고 나온 의상과 패션잡화 등을 사기 위해 한국 쇼핑몰에 접속했지만 결제하기 위해 요구하는 공인인증서 때문에 결국 구매에 실패했다고 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만 요구하고 있는 공인인증서가 국내 쇼핑몰의 해외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에 이어 1세션의 발제자로 나선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도 "한류열풍으로 인기 절정인 '천송이 코트'를 중국에서 사고 싶어도 못사는데 바로 액티브X 때문"이라며 "액티브X는 본인확인, 결제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해야 하는 한국만 사용하는 특이한 규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