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딸과 손녀 앞에 선 문단의 큰 별, 최인호 '나의 딸의 딸'

"1970년 11월28일. 내가 아내와 결혼할 때 황순원 선생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싫어하셔서 강연 같은 것을 한사코 사양하시던 선생님은 내가 부탁하자 서슴지 않고 이를 수락해주셨다. 첫 딸을 낳았을 때 선생님께 작명을 부탁드렸더니 선생님은 자신의 소설 '일월(日月)'에 나오는 '다혜'(多惠)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소설의 여주인공 중에서 내가 다혜를 가장 좋아하거든.' 그리고 2000년 10월25일. 나의 딸 다혜가 자신을 닮은 딸 정원이를 낳았다. 정원이는 나의 딸의 딸이다."

지난해 9월 '별들의 고향'으로 떠난 최인호(1945~2013)의 미발표작 '나의 딸의 딸'이 작가의 1주기에 맞춰 25일 출간된다. 작가가 작고하기 4년 전 지어둔 제목 그대로다.

"딸아이는 요즈음 사춘기의 절정에 있다. 지금은 내 큰 옷을 입고 다니고, 콘서트에 가서 소리 지르고 박수를 치지만 내일은 어떻게 변해버릴지 나는 시한폭탄을 하나 갖고 있는 것처럼 늘 불안하고 조심스럽다."(127쪽)

'나의 딸의 딸'은 작가이기에 앞서 한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인 최인호가 딸과 손녀에게 전하는 가슴 벅찬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다. 딸과 손녀를 이야기의 축으로 삼아 한 가족의 40년 세월을 기록한 가족연대기이기도 하다.

"정원이를 보면 모든 게 신기하다. 그저 무엇이든 정원이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인 것 같다.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게 해주고 싶고, 떼를 써도 다 받아주고 싶다."(246~247쪽)

책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작가의 딸 다혜의 탄생에서부터 유치원 입학, 초·중·고 시절, 대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 신혼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무려 40년에 이르는 세월을 사랑과 경이로움의 시선으로 기록했다. 2부는 다혜가 딸 정원이를 낳으면서 시작해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는 12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아, 아버지에게 딸은 누구인가. 그 딸은 어디서부터 내게 따님이 되어서 오신 것일까. 그리고 그 딸에게 있어 아버지인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신기하고 신기하구나."(182쪽)

돌도 지나지 않은 아픈 딸을 들쳐 업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는 아버지, 밤새워 시험 공부하는 딸을 몰래 훔쳐보며 홀로 한숨짓는 아버지, 신혼여행 떠난 딸의 빈방에 앉아 이별을 실감하며 눈물짓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유아원을 '땡땡이' 치고 손녀를 데리고 백화점에 놀러갔다가 딸에게 들켜 혼이 나는 할아버지, 손녀 앞에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춤추고 노래하는 할아버지,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드 공주처럼 하루에 한 가지씩 손녀에게 들려줄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진땀을 흘리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있다.

'별들의 고향' '겨울 나그네' 등으로 소설 붐을 이끈 문단의 큰별 최인호의 다른 모습이자 우리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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