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참 다행이다, 차지연 그녀가 '댄버스 부인'이어서

뮤지컬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은 주조연임에도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맨덜리 저택의 전 안주인 '레베카'를 계속 상기시킨다. 레베카, 죽었지만 살아 있다. 카리스마와 그로테스크함으로 점철된 캐릭터다.

당연히 뮤지컬스타 차지연(34)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노래가 곧 연기인 그녀의 폭발적인 뮤지컬 에너지는 상처와 한을 떠안고 사는 인물들에게 입체감과 더불어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영국 소설가 겸 극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으로 스릴러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로 유명한 '레베카'는 레베카의 의문사 이후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사는 남자 '막심 드 윈터'와 그런 막심을 사랑해 새 아내가 된 윈터 부인 '나'가 주인공이다.

댄버스 부인은 맨덜리 저택의 새로운 안주인인 '나'를 쫓아내려는 집사다. 자신이 모시던 원래 주인 레베카에 대한 집착으로 광기가 극에 달한다.

"'댄버스 부인'하면 미치광이, 광기 어린 여자라는 인식이 떠오른다. 어둡고 카리스마가 있고 표면적인 그런 것들이 몇가지 공식처럼 만들어진다. 나 역시 그런 부분에서 도움도 받았지만 그외의 것을 찾고 싶었다."

우선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와 맨덜리 저택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를 찾고 싶었다. "이 사람도 피해자일 수 있다. 엄청난 계기가 있었다는 거지. 그냥 맹목적이지 않다는 거다. 대사를 통해서도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걸 알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대리만족도 있었겠지. 댄버스도 여성인데 아름다운 레베카에는 그녀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완벽함이 있으니까."

댄버스 부인이 "정말 레베카를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개인적 욕심이다. "레베카가 많이 머문 서재에서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는 장면 등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계속 달라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 많고. 댄버스는 디테일 하나를 달리 해도 굉장히 큰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캐릭터다. 배우로서 재미가 있을 수밖에. 마지막 신이 끝나면 처연하고 깊은 외로움과 고독함이 느껴졌으면 한다."

댄버스 부인의 넘버는 고난도다. 차지연은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특히 탄탄한 저음이 도드라진다. 무조건 고음만 쏟아내는, 가창의 기교만 자랑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얘기다. 고음을 내야 하는 메인 테마곡 '레베카' 뿐 아니라 발라드 '영원한 생명'도 차지연 목소리의 힘을 입어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넘버 하나 안에서 기승전결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그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무조건 강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는 힘을 빼야지. 연기를 잘하는 영화배우들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오죠'라는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했다'라고 답하는 분들이 많더라.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를 할 때 구태여 뭘 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부터 '나는 무섭거나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입니라'라는 이미지를 걷어내고 갑자기 나오는 광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차지연의 강약을 조절하는 노련한 연기에 객석은 '나'의 성장감을 자연스럽게 감지한다. "'얘(나)를 이겨먹어야지'라는 생각보다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으로 해석했다.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면 설득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건, 댄버스 부인에 대한 이해와 동감을 끌어내기 힘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지. 댄버스 부인의 초연함 이면에 있는 공허함도 인정하고 싶었다."

차지연은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여성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지금까지 맡아온 '아이다'의 '아이다', '서편제'의 '송화',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 '카르멘'의 '카르멘', '드림걸즈'의 '에피',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그리드', '데빌'의 '그레첸'이 다 그랬다.

댄버스 부인은 능동적이라기보다 레베카에게 의존하다. 그리고 스포일러라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자신의 전부라 믿고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겼다가 배신을 당한다.

차지연은 그러나 "댄버스 부인은 가슴 아픈 배신이라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신선한 해석을 가했다. "단순히 일차원적인 생각보다는 그렇게 당당했던 레베카가 가장 아픈 부분을 자신에게조차 표현하지 않고 혼자 고스란히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과 비통함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그녀를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가장 아픈 구석을 알아보지 못한 것 때문에 가슴이 아팠겠지. 그러니 삶이 한번에 무너질 수밖에. 댄버스 부인의 그런 한이 제일 잘 묻어나는 것이 마지막 화재신이다. 그 부분에 정서가 잘 묻어나길 바랐다."

'레베카'는 이번이 세 시즌째. 차지연의 출연이 뒤늦었다는 감이 없잖은데, 역시나 초연 전 그녀의 댄버스 부인은 고려대상이었다. 당시 하루 차이를 두고 다른 작품의 출연을 결정하는 바람에 인연을 맺지 못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기운이라고 할까. 호호. 지금 출연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만났으면 지금 같은 생각을 못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을 거다. 지금 만난 것이 마음에 편하다." 그녀의 레베카가 애틋하면서도 모든 걸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레베카' 3월6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막심 류정한·민영기·엄기준·송창의, 댄버스 부인 신영숙·차지연·장은아, 나 김보경·송상은. 총괄 프로듀서 엄홍현, 협력 프로듀서 김지원, 작곡 실베스터 르베이, 극작가 미하엘 쿤체, 연출 로버트 조핸슨, 한국어 가사·대본 박천휘, 음악감독·지휘 김문정. 러닝타임 2시간50분(인터미션 15분 포함), 6만~14만원(서울공연). EMK뮤지컬컴퍼니·인터파크 티켓.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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