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연극의 역사, 대모 별세…백성희 누구?

3월의 눈(雪)은 실재와 환상을 오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분명 부드러운 얼음덩어리다. 3월은 그러나 자명하게 봄을 뜻한다. 눈이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다. 눈도 이를 아는지 금세 사라져 버린다.

연극 '3월의 눈'(2011년 초연) 역시 실재와 환상을 오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라짐을 이야기한다.

저물어가는 집 한 채가 있다. 그 오래 묵은 집에 살던 '장오'는 이제 곧 그 집을 떠나야 한다. 장오와 아내 '이순' 사이에 유일한 소생인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인 이 집을 팔았다. 인테리어 업자, 고목재상 등이 찾아와 쓸 만한 문짝과 마루 등의 목재를 떼어 간다. 집은 하나, 둘 제 살점을 내어주고 마지막엔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장오와 그의 추억 속 이순은 그러나 겨울을 난 문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입으로 물을 뿜고 기존의 창호지를 발라낸 뒤 그 위에 새 창호지를 바른다. 모든 일이 꿈 속의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일상을 지속한다.

실제 같은 노부부의 일상을 오롯하게 보여주던 연극은 어느덧 환상으로 접어든다.

이순을 연기한 원로 배우 백성희(91·이어순이)가 8일 세상을 떠났다. 장호를 연기한 장민호(1924~2012)는 약 3년 전 세상과 먼저 작별했다.

'3월의 눈'은 연극계의 산 역사로 통하는 두 사람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주인공들이다.

백성희는 2013년에도 이 작품에 출연했다. 그해 말 서울 명동예술극장에 오른 연극 '바냐아저씨'에 '마리아'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아흔이 다 된 나이에도 격조와 품격을 잃지 않았다. 실재와 환상을 오가는 '3월의눈'이 체화됐다. 지난해 가을부터 요양병원에서 힘들게 요양하는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였다.

2004년 '백성희 연극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자전 연극 '길'에 함께 출연한 연기단거리패의 대표인 배우 김소희는 "연극배우의 격을 높인 분"이라면서 "항상 너무나 맑고 정갈한 모습으로 격조를 지켰다"며 안타까워했다.

70여년동안 연극 인생을 걸어온 백성희는 17세 때 연습생으로 들어간 빅터무용연구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빅터가극단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으로 입단한 후 오로지 연극 한 길 만을 걸어왔다. 특히 19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현존해있는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원로단원이었다.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신조 아래 평생 400여 편의 연극에서 다양한 역을 맡았다. '봉선화'(1943),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강 건너 저편에'(2002) 등이 대표작이다.

1954년 배우 최은희와 함께 UN군 위문 공연을 위해 방한한 메릴린 먼로를 마중나가기도 했다. 1956년에는 첫 영화 '유전의 애수'에 최무룡 등과 함께 출연했다. 그러나 연극 연기의 힘을 믿었던 고인은 '봄날은 간다'(2001) 외에는 거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1972년 국립극단 사상 최초로 시행된 단장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 단장으로 선출된 일은 연극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의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한 번 국립극단 단장에 추대됐다.

2002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동아연극상(1965), 대통령표창(1980), 보관문화훈장(1983),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4), 이해랑연극상(1996), 대한민국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10) 등을 받았다.

최근 고인의 삶을 조명하는 '백성희의 삶과 연극, 연극의 정석'이 출간됐다. 국립극단은 1950년 국립극단 창단과 함께 단원으로 활동해온 백성희의 연극계 업적을 기리고 국립극단 65년사를 돌아보는 의미에서 연극인 심포지엄 '국립극단 65년과 백성희'를 지난달 말 열기도 했다.

연극계는 큰별이 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한국 연극계의 대모로 연기 기술을 거듭 훈련하면서 표준를 만든 선구자적인 분"이라며 "국립극단이 창단될 때부터 한번도 국립극단을 떠나지 않은 기둥이고 뿌리"라고 돌아봤다. "사실은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3월의 눈'을 다시 하고 싶다고 말씀했다"며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김소희는 "명배우임에도 긴장과 무대에 대한 두려움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무대에 대한 경외심이 엄청났다"며 "박정자, 손숙 선생님으로 이어지는 한국연극계 여배우 역사의 맨위에 있는 상징"이라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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