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탄생 100주년·서거 10주년을 맞은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1915~ 2005)가 1953년 발표한 희곡 '시련'은 2015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시의성을 지닐 수 있을까.
국립극단의 올해 기획 주제인 '해방과 구속'의 마지막 작품으로 연극 '시련'을 올린다. 극단 풍경의 대표인 박정희 연출은 19일 "보통남자가 죽음과 대면하면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공연의 코드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죽음 앞에 선 공포, 거기서 일어나는 개인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밀러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렸던 미국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그 역시 이 거센 바람의 피해자였다. 1692년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세일럼 마녀재판'이 배경이다. 당시 종교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19명을 교수형에 처하는 등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밀러는 폐쇄적인 마을 세일럼 주민들의 잘못된 종교적 믿음과 사적 욕망, 권력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집단적 광기로 인해 삶의 기로에 서게 되는 '존 프락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프락터는 과거의 하녀인 '아비게일'과 불륜을 저질러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데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나서지 않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마녀재판에 연루되자 거짓 고백으로 얻는 삶과 명예로운 죽음 사이에서 고민한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버리고 존엄을 지킨다.
'시련' 연출이 두 번째라는 박 연출은 "첫 번째는 해석을 정통적으로 했는데 이번에는 동시대에 가깝게 접근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툭하면 '종북'으로 몰리는 2015년 한국과 '시련' 속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박 연출은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작품의) 메시지로 (연출) 방향을 잡지는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그런 상황이 던져졌고, 구조가 그렇게 돼 있으니 강화시킬 필요 없다. 거기서 생겨나는 역학관계에 중점을 두고자 하다. 정치극을 표방하고 하고 싶지 않다. 사회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개인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권력 시스템과 잘못 돌아가는 종교의 물질성 등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박 연출은 개인의 정직함이라고 봤다. "존엄성이 있어야 한다.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정직과 만나면서 존엄성을 찾아갈 때 하나의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락터가 희생을 당하지만 의미가 있다. 작품을 연습하면서 계속 심리학, 정신분석 등을 언급하게 되는데 프락터는 내적인 힘이 강한 인물이다."
이 작품의 번역자이자 연극평론가이기도 한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역시 "죽음의 공포로부터 위협받던 프락터가 이를 결국 극복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킨다"고 확인했다. 무엇보다 "밀러가 서민도 비극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짚었다. "그리스극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왕이나 귀족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비극의 원리 중 하나인데 평범한 사람인 프락터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순재와 이호성이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원칙과 주장을 바꾸지 않고 무자비하게 사형을 선고하는 광기의 '댄포스' 역을 나눠 맡는다.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여러 번 출연하고 2013년 극단 관악극회에서 올린 '시련'을 연출하기도 한 이순재는 '시련'의 핵은 "생명의 존엄성"이라고 짚었다. "밀러는 정치적인 탄압과 편견에 의해 인권이 말살당하는 걸 봤다. 강하게 인간 존엄을 주장하는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그가 국립극단 작품에 제대로 출연하는건 57년 만이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58년 '시라노 드 베르주락'에 단역 등 그해 수습생으로 2번 출연한 뒤 이번에 참여하게 됐다. "(연기 인생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국립극단 작품에 참여하게 돼 보람이 있다"며 만족해했다.
프락터는 '길 떠나가는 가족'의 이중섭, '에쿠우스'의 앨런 등 선굵은 연기로 정평이 난 지현준이 연기한다. "너무 명작이라 출연을 꿈꾸던 작품인데 빨리 찾아와서 영광"이라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개인적인 본질에 집중하게 된다. 내 안의 소리가 무엇인지 듣고 있는데 영혼을 담는 것이 목표"라며 눈을 빛냈다. 박 연출은 지현준에 대해 "인간을 연극적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깊다"고 치켜세웠다.
'유리동물원' '내 마음의 풍금' 등을 통해 주로 순수한 모습을 보여준 정운선이 팜 파탈인 아비게일을 연기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마을을 혼란에 빠뜨리는 캐릭터다. 정운선은 "통제되지 못할 만큼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건 결핍 때문"이라며 "아비게일의 그 결핍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2월 2~2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데 이미 좌석의 90%가량이 팔려나갔다.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배우들이 출연하지 않고, 다소 어렵다는 인식이 있는 고전인데 이례적인 반응이다. 김 예술감독은 "좌석의 100%가 다 팔려, 싼 값에 사석까지 오픈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 중"이라며 "'시련'이 연극적으로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사회적으로 밀접한 지를 관객들이 아는 것 같다"고 봤다.
프로시니엄, 즉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액자 모양의 전형적인 극장 구조 극장에서는 이례적으로 무대 뒤편에 객석 36석도 마련한다. 관객과 관객이 마주보는 모양새다.
박 연출은 "관객과 관객이 대치하고, 서로 보는 거울의 콘셉트"라며 "무대 디자이너한테 제의 공간처럼 만들어달라고 제안을 해서 도가니 콘셉트가 됐다. 관객들이 보고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끔 만들고자 한 것이 의도"라고 전했다.
엘리자베스 프락터 채국희. 윤색 고영범, 미술 신선희, 조명 김창기, 음악 장영규·김선. 러닝타임 160분(휴식 미 포함).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한편 12월5일 공연 후 공연읽기 프로그램으로 '잔혹과 광기의 역사, 마녀사냥 이야기'가 펼쳐진다. 12월6일 공연 뒤에는 예술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