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초점]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이는 언론인 김을한(1905~1992)이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미상 결정을 비난이나 하듯 1959년 말 연합신문 윤치호에 대한 글에서 강조한 말이다. 19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기자로 활동하여 많은 인물에 대한 기사를 쓴 언론인이니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윤치호 애국가 작사 사실, 이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이상과 같은 확신에 찬 증언들에서 재삼 확인된다.(증언은 기록 자료가 있는 상태에서 보완 관계에 있는 구술 지위이지, 단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은 '구술(口述) 자료'일 뿐이다)

작사 사실이 진실이기에 이 같은 현상은 자연스런 현상이지 특별한 논리나 난해한 사료 해석을 통한 결과는 아니다. 방정식을 풀듯 어렵게 해명되는 것은 저간에 어떤 의혹이 있는 경우로, 대개 논란이 있는 사안들에서 확인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든지 끝을 밖으로 들어낸다'(囊中之錐)는 말처럼, 진실이라면 '또 다른 기록'으로, '또 다른 증언'으로, 그리고 이미 사라진 '어떤 것'으로 사실임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는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사실에도 적용이 된다.

시기와 형태가 다양한 기록 자료와 함께 다양한 증언들이 자연스럽고, 맥락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증언 분야는 그동안 기록 자료만으로도 입증이 가능하므로 굳이 강조될 필요가 없었기에 별도로 논의된 바 없었다. 다만 다른 작사설의 경우 기록이 없이 구술 만을 유일한 증거로 한다는 점에서 대응차원에서 정리하여 제시할 필요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 증거력 없다

윤치호 작사 증언 중에는 다른 작사자설과 대척점에 있는 것과 자체 모순 관계에 있는 것과 절대 증언이 있다. 대척점에 있는 경우는 이광수가 기록한 것에 대한 상치되는 주장이다. 이미 "흥사단의 주장은 이광수 저 '도산 안창호' 이후 확대 재생산되고 학습된 일부의 증언"(신동립 잡기노트, 뉴시스 2013년 8월19일)이란 비판을 받은 도산 안창호의 기록에 대한 윤치호와 안창호 측 주장이다. 즉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 하지 아니하였다"에 대한 가족의 반응이다.

허영숙(이광수 부인), "춘원이 도산 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를 도산이라고 쓴 것에 대해 윤치호씨의 자제가 문의했을 때 춘원이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납득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주영환, "이광수의 도산 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씨라고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안영자씨를 통해 정정할 기회를 만들기로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상과 같이 하나의 사안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양측 모두 증거력이 없다고 본다. 결국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의 증언은 영원한 평행선일 수 있다.(그러므로 가족이 제시하는 기록 자료가 아닌 증언이나 주장은 참고자료로 채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내용 자체도 구체적이거나 논증적이지 않아 각 주장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 할 가치는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 하지 아니하였다"라는 대목에서 그 이유가 제시되지 않아 막연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인서 목사가 1955년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원작자를 밝히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주장했다.

"일제 압박 하에서 윤치호 선생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윤씨 작이란 기록을 볼 때 절의감(節義感)에 상처를 받았으나 역사는 고칠 수 없다. 애국가 작사자는 불행실절(不幸失節)했으나 국존(國尊) 도산 선생의 품에서 기르고 도산 선생의 목소리로 전해 애국가로의 대의명분을 잃지 아니했다."

'나라가 존경해야 할 안창호 선생이 말하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윤치호에게나 국민들에게나 상처를 줄 필요가 없어서이고, 그 대신 자신이 솔선하여 사랑으로 키웠다'라는 해석이다. 이는 김구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를 '실명(失名)'으로 지켜온 배경으로, 애국자이며 인격자로서 두 분은 애국가의 지극함을 지키고 가꾸기를 실천한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 애국가론인 것이다.

◇주요한의 자기 모순적 증언

주요한(1900~1979)은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근대사 형성에 주목되는 시 ‘불놀이’를 발표한 문인이기도 하지만 이광수와 함께 안창호와 가장 가까운 '흥사단 맨'의 일원이다. 1920년 5월14일 흥사단 입단식에서 이광수는 입단 번호 104번, 주요한은 105번을 받았다. 그리고 최남선은 흥사단 지도위원으로, 이광수는 흥사단 원동회원 1호, 주요한은 2호로 입단,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초기에 함께 했고 해방 후에 흥사단을 후원하고 방대한 '도산전서'(1963)를 저술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언급을 했다.

'도산전서', "대성학교 대리 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주장 전후의 일부 기사는 생략하였는데, 요는 도산이 쓰고 그 이름을 윤치호에게 주고 윤치호는 이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이 쓰여지기 8년 전인 1955년 4월19일자 경향신문 기고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안창호설을 강하게 부정한 사실이 있다.

'애국가작사자는 누구',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런 주요한의 태도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대단한 자기모순인데, 그래서인지 흥사단 측에서는 '도산전서'나 경향신문 기사를 모두 폐기한 듯하고,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2003)라는 책에서는 "친일파 이광수·주요한의 안창호 전기를 교정하고 갱신··"이라고 하여 아예 친일피로 매도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성향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주장의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대성학교가 설립된 시기와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점과의 선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흥사단이 밝힌 대성학교 개교는 1908년 9월이고, 애국가가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6월이라는 사실이다. 위의 '도산전서' 기록은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주요한의 진영논리이다. 주요한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시기는 1947년부터 대한무역협회 회장 등 산업 분야에 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자기 소신대로 발언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1963년 '도산전서'를 집필할 때는 흥사단에서 안창호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란 점에서 집필을 의뢰했으니 당연히 흥사단이란 진영논리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누구든 진영에 구속될 때 그 논리를 수용하거나 함몰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된다.

이상의 주요한 기록은 결국 안창호 전기를 쓰면서 진영논리대로 기록하여 전혀 다른 설을 유포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 된다. 물론 이런 현상은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구술 자료만을 통하여 확립하려는 과욕이 빚은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당시로서는 자료가 체계화된 도서관도 없었고 오늘 같은 인터넷 검색도 불가능한 시기이니 교차 검증을 할 상황이 못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결론을 정해 놓고 구술자료를 택하는 방법도 문제지만, 구술자료에 대해서는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서 수용해야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중요함을 알게 한다.

◇국민회 중심 인물 송헌수의 '윤치호 작사' 증언

윤치호의 작사 사실에 대한 증언은 수없이 많다. 전 연세대 총장 백낙준, 언론인 김동성, 목사 채필근,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 등이 있고 한영서원 제자로는 최규남 외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 증언자 중에는 특별히 신뢰하게 하는 인물들이 있다. 예컨대 대성학교 교사 채필근과 같이 안창호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이들이다. 또한 윤치호 측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채필근, "내가 25세 때에 대성학교(안창호 운영)에서 수학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하였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황실가(皇室歌)와 태극가(太極歌) 등 옛 노래들을 평양서 해방 후까지 보존하였는데 황실가와 애국가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 입니다."

이 증언은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당사자인 안창호가 밝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증거력을 갖는다. 또한 이 사실에서 안창호의 인격을 재확인하게 된다. '죽어도 거짓이 없어라'라는 그의 신조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례로 확인되는 증언이 또 확인되었다. 안창호가 주도한 미주 국민회 후기 주요 인물인 송헌수의 증언으로 윤치호 작사를 확인시켜 준다. 우리나라 여성 언론인의 상징인 최은희(1904~1984)가 쓴 '여성전진 70년'이란 책의 '3·1절 경축행사와 애국가'란 글에서다.

최은희, "지금의 애국가 가사는 3·1운동을 전후해서 퍼진 것인데 작자는 윤치호, 안창호 설이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없고, 1955년 6월 전날 해아밀사(海牙密使) 사건의 수행원이 되어 이준 열사와는 두터운 교분을 가졌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책임도 가진 일이 있었던 철학박사 송헌수씨가 우리나라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에 틀림없다는 서한을 미국으로부터 보내준 일이 있었다."

물론 이 증언이 증거력을 갖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보낸 서한'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은희의 글은 일반인의 기록과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고, 1910년 신한민보의 '국민가' 존재를 통해 맥락적이란 점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송헌수는 1922년 북미대한인국민회를 발족시킨 인물인데, 이 단체가 1940년 12월 중경 임시정부에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를 청원하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윤치호의 1907년 작사→1910년 국민회의 '국민가' 채택→국민회의 애국가로 사용→1940년 국민회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1945년 9월 '자필 가자지 존재'라는 맥락적 흐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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