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모딜리아니 국내 첫 회고전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

긴 목에 길쭉한 얼굴, 눈동자 없는 아몬드 모양의 눈을 한 인물화로 기억되는 요절 화가 모딜리아니(1884-1920).

모딜리아니의 예술과 삶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국내 첫 회고전인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Amedeo Modigliani:Legend of Montparnasse)' 전이 오는 26일부터 서울 서초구에 있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막을 올린다.

겨우 35살에 결핵으로 숨진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작가 모딜리아니는 10여 년의 화가 생활 동안 400점이 채 안 되는 작품만을 남겼지만 20세기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의 대표화가로 기록됐다. 에콜 드 파리란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였던 외국인 화가들을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그의 짧은 생은 그로 하여금 반 고흐와 같은 요절한 천재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상식을 파괴한 독특한 인물 표현방식은 그를 신비에 가득 찬 예술가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특히 10대 소녀였던 마지막 연인 잔느(Jeanne)와의 격정적 러브스토리는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랜 준비 끝에 마련된 이번 전시는 2004년 샤갈전을 시작으로 피카소 모네 반고흐 고갱 르느와르전 등 초대형 전시를 열어 히트한 서순주 박사의 12번째 전시다. 앞서 샤갈전은 70만 명, 2007년 반 고흐전은(단일기간에) 83만명 관람객 돌파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전 세계 40여 소장처로부터 진품 70여 점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파리시립미술관, 피카소미술관, 오랑주리미술관, 그르노블미술관, 헬싱키아테네움미술관, 미국톨레도미술관, 이스라엘미술관, 멜버른빅토리아국립미술관, 오사카시립근대미술관 등 세계유수의 20여 공공미술관과 개인소장 20여 곳과 접촉했다.

전시관계자는 “작품의 희귀성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작품가격에 비추어 볼 때 모딜리아니 전시사상 유례없는 기념비적인 전시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현재까지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최고가는 지난 2010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900만 달러(약 768억원)에 낙찰된 '아름다운 로마여인 La Belle Romaine'(1917년작)이다.

이번 회고전은 모딜리아니의 예술세계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1906년부터 1920년까지의 유화 , 드로잉 작품으로 구성됐다. 간결하고 응축된 특유의 표현양식을 보다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남자의 초상' '여인상 기둥' '여인의 초상' '누드' '종이작품' '모딜리아니와 모이즈 키슬링' 등 총 6개의 테마로 선보인다.

모딜리아니의 예술은 지리적으로 당대 전 세계 예술가들의 산실이었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 두 장소로 구분되며 , 파리에 도착한 1906년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회화 약 350점과 조각 약 30점으로 나뉜다.

이번 전시는 파리에서 활동했던 전 시기 동안 그 어떤 장르보다 모딜리아니가 몰두했던 초상화를 대거 소개한다 .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는 20세기 초 폭발적으로 발전한 파리의 문화와 그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폴 알렉상드르 , 폴 기욤과 같은 개인 소장가 및 젊은 화상들 , 모이즈 키슬링 , 샤임 수틴 ,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의 작업실을 자주 드나들던 여인들 중 루냐 체코프스카, 러시아의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와
 더불어 마지막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를 담은 초상화도 빼놓을 수 없다.

1916~1917 년에 제작된 대형 누드화 연작 중 ‘셀린 하워드의 초상’(1917, 개인소장, 미국) 과 ‘머리를 푼 채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1917, 오사카시립근대미술관 소장) 를 통해 모딜리아니 후기 작품세계의 성숙미와 관능미에 대해서도 집중 조명한다 .

더불어 몽파르나스에서 브랑쿠시를 통해 조각가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1910~1913년 이후 더욱 확고해진 모딜리아니 화풍의 유화와 종이작품을 통해 아프리카 원시부족 조각품에 영향을 받은 그의 이국적인 색채를 확인할 수 있다.

◇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외설 이유로 철거"

모딜리아는 1884년 7월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Livorno) 에서 유대인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은 철학자 스피노자의 후손으로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가르신은 11세경 늑막염을 앓고, 14 세에 장티푸스에 걸리고, 16세에는 결핵균에 감염돼 늑막염이 재발하는 등 매우 병약한 아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고 여행을 데리고 다녔다.

나폴리, 로마 등 이탈리아 남부와 피렌체, 베니스를 여행하며 예술 방면에 있어 모딜리아니의 천부적인 재능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898~1900년까지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의 화가 미켈리의 미술학교에 다녔고 이후 예술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미술과 더불어 문학에도 매진했다. 모딜리아니는 니체, 보들레르, 로트레아몽의 글을 읽으며 문학적인 감성을 예술에 접목시킬 수 있는 자질을 갖춘다 .

1906년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7년 12월3일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의 갤러리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연다.

그러나 전면에 전시된 그의 누드화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으며 전시도 일찍 문 닫게 되어 작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망하게 놓치고 만다.

모딜리아니는 결국 1920년 1월24일 결핵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서야 그의 삶과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게 된다 . 모딜리아니 예술의 독창성은 그 어떤 양식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근현대미술사에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오늘날까지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전시는 10월4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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