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했어요."
가수 권인하(56)가 21년 만에 뮤지컬에 출연했다. 20세 춘호와 19세 순이가 1970년에 만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몸소 겪으며 청년·중년·노년을 보내는 이야기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나온다.
춘호를 연기하는 권인하는 최근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에서 만나 "뮤지컬은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데 매개체"라고 말했다. 권인하가 뮤지컬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앞서 1994년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로 뮤지컬에 데뷔한 이래 처음이다.
이 뮤지컬을 선택한 이유는 "공감할 수 있어서"라고 전했다. "우리 시대 어머니, 이모, 고모 이야기다.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오셔서 고생한 분들. 그분들 때문에 지금이 있다."
10대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연기한다. "10대가 가장 어렵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춘호가 아무 생각이 없는 10대가 아니거든. 막연하게 어린 척만 하면 안 되더라."
극 중 춘호처럼 권인하도 사업에 실패했다. "교만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고 돌아봤다.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서면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면서 인생이 망가지는 거지. 누군가에게 계속 대우받기를 원하게 되는 거다."
1960~90년대를 풍미한 노래 약 30곡이 내내 흐른다. 김국환, 이미자, 김추자, 신중현, 이장희, 김정호, 심수봉, 조용필, 이용, 이문세, 이선희 노래다.
한국 대중가요의 황금기다. "이장희, 트윈폴리오의 포크부터 패티김의 스탠더드 팝까지 장르가 정말 다양했다. 신중현의 애드포는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들려줬고."
최근 복고 문화가 계속 회자하는 이유에 대해 "바로 그림이 연상되는 가사 때문"이라고 짚었다. "예전 노래는 가사만 들어도 드라마와 그림이 상상이 됐다.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이 많았지. 그런 풍부함에 대한 반작용이지 않나 싶다."
'꽃순이를 아시나요'에는 본인의 노래인 '사랑이 사랑을' '오래전에'도 포함된다. "일부 관객들은 저를 보러 오실 수도 있어서 배려라고 생각했다"고 쑥스러워했다. 무엇보다 그의 대표곡은 '비오는 날 수채화'. 커튼콜 때 관객이 요청하면 이 곡을 들려준다. "'비오는날 수채화'로만 저를 단편적으로 평가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동안 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지."
책임을 지고자 14년만인 지난해 새 정규 음반 '권인하#6'을 발표했다. 2000년 5집 '사랑이 사랑을' 이후 처음이다. 신곡 '못난 이 사랑'과 '내일을 위하여' 등 총 14곡이 실렸다. 1984년 그룹사운드 WE로 데뷔한 그는 이듬해 12월 가수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를 작사·작곡하며 작곡가로 나섰다. 2011년에는 이치현, 강인원, 민해경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컬러스(the Colors)'를 결성한 바 있다.
그동안 제대로 음악을 하지 않고 '다른 비즈니스'를 한 것도 "어떻게 보면 교만함"이라고 했다. "원하는 만큼의 위치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지.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고. 과연 내가 적극적으로 도전했다면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다시 음반을 내고 소속사 식구들이 방송 활동 계획을 묻는데 무조건 다 잡으라고 했다. '니들이 하라면 다 할 테니까'라고 말했다.(웃음)"
그래서 권인하를 최근 KBS 2TV '불후의 명곡'과 MBC TV '복면가왕'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복면가왕'에서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새까만 후배들과 정면대결하기도 했다. 몇 년 전에는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총출동했던 MBC TV '나는 가수다'의 섭외도 거절했던 그다.
"인터넷 기사 댓글에 '권인하가 복면가왕에?'라는 내용이 있더라. 하지만 노래로 사람들 가슴을 울리는데 나이가 많고 적고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오래 노래를 불렀어도 내가 정말 현역으로 뛰려면 그 누구와도 붙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몇 년 노래를 더 했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가?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 거 따지면 뒷방 노인네가 돼야지."
권인하는 한때 연기도 했다. 1992년 MBC TV 미니시리즈 '창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연출 황인뢰)의 주인공 '송석찬'을 연기했다. 가수 출신으로는 첫 MBC 미니시리즈 주인공이었다.
"그때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연기에는 별로 뜻이 없었지. 겁도 났고, 잘해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했지(웃음). 뮤지컬을 계기로 이제 연기도 다시 해보고 싶다."
'꽃순이를 아시나요'는 "자신의 연기를 점검할 좋은 기회"라고 기대했다. "노래든 연기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더 이상 가릴 것도 없고(웃음). 뮤지컬은 또 다른 분야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관문이다. 즐거움의 시작이지."
'꽃순이를 아시나요'는 25일까지 정동길 정동극장 옆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 화암홀. 순이 도원경. 러닝타임 1시간 50분(인터미션 없음). 3만~5만원. 은세계씨어터컴퍼니. 02-747-22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