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현대상선 등기이사직을 내려놓고 무상감자(감자)까지 결정하면서 사실상 경영권 상실을 무릅쓴 백의종군 의지를 내비쳤다. 채권단에게 경영권을 넘기더라도 회사를 살리겠다는 의지다.
현대상선 이사회 의장 역할을 수행해온 현 회장은 3일 이사회 의장직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현 회장과 김명철 상무가 사내이사에서 물러나고 김정범 전무와 김충현 상무를 신임 이사로 선임키로 했다. 이는 현 회장이 현대상선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미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 회장이 물러나는 것은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마련한 고강도 추가 자구안이 보다 중립적인 이사회의 의사결정을 통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로써 현 회장은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과 합의한 추가 자구안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입할 여지를 스스로 없앴다. 현 회장에 앞서 현대상선 이백훈 대표이사 사장 등 임원과 간부사원들도 거취와 처우 일체를 이사회에 맡기며 백의종군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함께 현대상선은 이사회를 열고 주식 감자를 통해 액면가 5000원의 주식 7주를 액면가 5000원의 주식 1주로 병합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현대상선은 자본금을 줄임으로써 회계장부상 자본잠식 50% 이상 상태에서 벗어나고 유가증권시장 상장폐지 위기도 모면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이 경우 현 회장의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상선의 최대주주는 현대엘리베이터(지분율 18%대)고 현대엘리베이터는 현 회장과 특별관계자(지분율 26%대)가 지배하고 있는데 이번 감자 이후 채권단 출자전환, 그리고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증자 등이 차례로 이뤄지면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 지위를 채권단에 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영권 상실 위험에도 이번 감자를 결정한 것은 외국선주들과의 용선료 인하 협상을 위한 포석으로도 풀이된다. 돈을 벌어도 용선료를 내느라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서 고액의 용선료 계약이 유지되는 한 현대상선의 회생은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현대상선은 감자 등 뼈를 깎는 노력을 보여줌으로써 외국선주들의 대승적인 양보를 끌어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이사회 결정은 18일 열리는 주주총회 의결을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현대상선 주요주주는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해 현대중공업(지분율 10%대), Market Vantage Limited(지분율 7%대), 현대건설(지분율 5%대), 우리사주조합(지분율 5%대)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