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매출 8조3000억원, 외국인 매출 5조원, 전 세계 시장 12% 점유. 지난해 중국과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한 한국 면세시장(시내 면세점 기준)의 기록들이다.
최근 몇 년간 한류 바람에 힘입어 한국을 찾는 중국인들이 급증하면서 면세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지난 2005년 70만명에 불과했던 중국인 방문객은 10년 동안 8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2012~2014년 3년 간 총 1300만명의 중국인들이 한국을 찾았다. 덕분에 한국 면세시장은 올해 10조원을 바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지난해 외국 관광객이 한국에서 쓴 돈은 19조원으로 이 중 5조원을 면세점에서 사용했다. 전체 관광수입의 27% 규모다.
면세산업은 외화획득은 물론 외국 관광객 유치에 효자 노릇을 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있지만, 곳곳에서 시한부 면세사업자란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기존 면세점 특허권은 10년 단위로 자동 갱신됐으나 2013년 관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특허 기간이 5년으로 단축되고 특허를 재입찰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사업자에 '5년 시한부 면세사업'을 채우는 것은 경영 안정성 확보나 장기 투자 청사진 마련에 치명적이다. 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면세 사업은 상품과 물류 용지 확보, 해외 시장 개척 등 진입 초기 인프라스트럭처 투자가 필요한 업종"이라며 "초기 투자비는 기본 2000억원인데 기존 기업이 탈락했을 때 이를 모두 날리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재승인이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어떤 기업이 과감하게 투자하겠냐는 게 이 관계자의 얘기다.
지난 15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면세점 제도 개선을 위한 공청회에서도 "현재의 5년 시한은 기업의 안정적인 경영에 지장을 초래하고 투자의욕을 꺾는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날 소한섭 중기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나 같은 경우도 5년만 사업하고 그만두라고 하면 성공할 자신이 없다"며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사업을 해야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고 마케팅 비용도 쓸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면세산업의 각종 규제를 둘러싼 특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면세점의 자유로운 시장 진입을 허용하고 대신 5년 기한을 포함한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정재완 한남대 무역학과 교수는 "면세점을 놓고 특혜나 독과점 같은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정부 특허라는 진입장벽 때문"이라며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진입장벽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면세시장은 대형화된 면세점들이 점유율을 갈수록 높여가고 있는 모양새다. 올해 초 이탈리아 면세기업 월드듀티프리그룹(WDFG)를 인수한 스위스의 듀프리(Dufry)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매출 6조2000억원을 기록한 듀프리는 2014년에도 스위스 면세 기업 뉘앙스(Nuance)를 인수하는 등 자본력으로 세계 면세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다. 세계 10위권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은 2010년 37%에서 2014년 45%로 증가했고, 3위권 업체들의 점유율은 16%에서 25%로 크게 증가했다.
국내 기업들도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발맞춰 대형화를 통한 시장 수성과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현재 국내 업체 중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은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 두 곳뿐이다.
롯데면세점은 지난해 매출 4조3000억원으로 세계 3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2조5000억원의 신라면세점은 세계 7위를 차지했다. 양사 모두 규모의 경제 실현을 통해 주변 경쟁국 대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면세업은 환경변화에 매우 민감한 고위험군 사업으로 지난 메르스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외국 관광객들은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다"며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기업들이 면세업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인 관광객 의존도가 커진 점도 부담스러운 부분인데 위안화 쇼크가 장기화될 경우 해외 관광에 나서는 중국인 자체가 급감하면 국내 면세점들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며 "최근 엔화 약세로 인해 한국 대신 일본을 선택하는 중국인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도 우려스럽다. 면세사업은 국내 사업자간 경쟁이라기 보다는 외국 면세점과 경쟁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 면세시장은 규모면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 지난해 전체 매출 8조3000억원, 세계 시장의 12% 비중으로 단연 1위다. 기업 순위에서도 롯데면세점이 3위, 신라면세점이 7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규제 발목 잡기에서 자유로운 글로벌 기업들의 광폭 행보에 비하면 한국 면세시장은 제자리 걸음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 특허권이 만료되는 롯데면세점 소공점과 월드타워점, 워커힐 면세점의 사업자 선정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한 면세시장의 경쟁력 강화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면세산업은 외국인 관광수입의 약 3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외화벌이 사업이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키워나가야 할 우리의 미래산업"이라며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규제완화와 정책적 지원이 이어진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듀프리 못지않은 세계적 기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면세 시장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면세업의 특성이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마냥 '황금알'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지난 1980년 서울 소공동에서 첫 시내면세점이 영업을 시작한 후 35년 동안 숱한 위기를 겪고 성장한 한국 면세산업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면세시장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각계의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