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대기업·외국 자금 비켜"…토종 사모펀드, 거침없는 하이킥

외국 자본 '대항마' 목적으로 도입한 PEF 제도

지난달 7일 새벽 5시 30분 홍콩의 모 호텔. 이날 새벽 2시까지만 글로벌 사모펀드와 손잡고, 홈플러스 인수를 자신하던 국내 주요은행 관계자들은 무릎을 치고 말았다. 불과 3시간여만에 상황이 180%도 바뀐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묘수를 들고, 새벽 시간대 판를 뒤집우며 국내 인수합병(M&A) 사상 최대규모를 실현시킨 이는 토종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의 김병주 회장이었다.

그는 협상 막판에 영국 테스코측에 두 가지 획기적인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테스코 측이 줘야할 직원 위로금은 물론이고, 테스코측이 각 지역 점포에 대해 보증을 선 금액 등 총 5000억원에 대해 모두 인수자측이 떠안겠다는 파격적인 안을 제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MBK파트너스가 영국 테스크와 홈플러스 지분 100%를 사상 최대 인수가인 7조2000억원에 사들이는,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새 역사는 이렇게 쓰여졌다. 

토종 사모펀드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사모펀드의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내용의 새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25일부터 시행됐기 때문이다. 그동악 규제됐던 다중 특수목적회사(SPC)가 도입괴고 기업인수 외에 주식, 채권, 부동산 등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277개 수준인 사모펀드가 머지 않아 1000개까지 급증, 기업 구조조정 시장의 주체로 등장할 것으로 내다고 보고 있다. 

◇ 외환 위기 이후 외국 자본 '먹튀'에 시달린 정부, 대항마로 토종 적극 키워

정부가 외국 자본에 대한 '대항마'로 육성하기 위해 도입한 사모투자전문회사(PEF·Privat Equity Fund) 제도가 첫 발을 뗀지 11년 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바야흐로 'PEF 전성시대'다. 

사모펀드는 소수의 고액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장기로 조달한 펀드를 말한다. 주식, 부동산, 부실채권, 기업경영권 등 돈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며 높은 투자 수익을 노린다. 

회사를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한 뒤 가치를 높여 되팔아 수익을 남기는 '바이아웃(buy out)' 형태의 투자 전략을 많이 쓴다.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되살리는 순기능을 하지만 철저히 경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냉정함 때문에 사모펀드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은 외국 자본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당시 국내에 진출한 외국 자본은 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매물로 나온 우량기업들을 인수해 막대한 수익만 남긴 채 떠나가기 일쑤였다. 

외국에 비해 국내 자본시장은 취약했다.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사 구조조정을 도왔지만, 효율성이 낮았다. 또 공적자금을 들여 회생시킨 기업들이 다시 외국 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는 불안감도 팽배했다. 

정부는 외국 자본에 맞서기 위해 국내 민간 자본을 키우기로 했다. 2004년 12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에 PEF 제도를 도입해 기업 경영권 인수, 구조조정 등을 전담할 기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로 했다. 

그 결과 11년만에 PEF 숫자는 약 140배, 출자약정금액은 120배 이상 불어나는 큰 결실로 이어졌다.

◇4000억→51조…강산 한 번 변할 때 몸집 '128배' 불린 PEF

PEF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 만에 국내 PEF 시장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에 등록된 PEF의 수는 277개로 출자약정 총액은 51조2442억원에 달한다. 

10년 전인 2004년 말 PEF 수 2개, 출자약정 총액 4000만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다. 

강산이 한 번 바뀌는 동안 PEF 수는 약 139배, 출자약정 총액은 128배씩 증가했다. 

출범 11년째를 맞은 올해도 성장세는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 조사 자료인 지난 9월말 PEF 등록 현황을 보면 PEF 수는 301개, 출자약정 총액은 56조6289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대형 토종 PEF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PEF로는 MBK파트너스, 한앤컴퍼니, IMM인베스트먼트, 보고인베스트먼트, 스틱 등이 있다. 

9월 말 현재 국내 최대 PEF는 MBK다. 출자약정 총액은 6조1292억원이며 홈플러스, 코웨이, 씨앤엠, 네파 등에 투자하고 있다. 

한앤컴퍼니(3조3456억원)와 IMM(3조1508억원)의 출자약정 총액도 3조원을 넘고 보고(1조9296억원)와 스틱(1조6552억원) 등도 1조원 이상씩을 기록 중이다. 

자본시장연구원 박용린 금융산업실장은 "2004년 PEF 제도가 도입된 뒤 우리나라 PEF는 매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며 "국내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한 연기금 운용규모의 급증과 이에 따른 대체투자 수요의 지속적 증가 그리고 국내 M&A(인수합병) 시장의 수요공급 등이 PEF 성장의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초대형 PEF' MBK·한앤컴퍼니 어떻게 컸나? 

MBK와 한앤컴퍼니는 국내 PEF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MBK는 지난 2005년 출범했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회장 사위이자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석사 출신인 김병주 회장이 설립했다. 

MBK가 자본시장에 이름을 제대로 알리기 시작한 건 약 2년 전부터다. 

지난 2013년 웅진그룹은 계열사의 잇따른 부실로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웅진코웨이를 매각하기로 했다. 

MBK는 매년 순수익만 수백억원씩 내던 웅진코웨이를 잡기 위해 과감한 베팅을 시도했다. 웅진코웨이 지분 31%를 1조1915억원에 사들이며 새 주인으로 우뚝 섰다. 

구조조정과 주먹구구식 경영 방식을 타파한 MBK는 약 2년 만에 코웨이의 시장 가치를 3조원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코웨이는 올해 2분기 영업이익 1117억원을 기록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토정 PEF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것도 MBK다. MBK는 지난 9월 홈플러스를 사상 최대 인수가인 7조2000억원에 사들였다. 

놀라운 것은 당시 MBK가 글로벌 PEF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을 꺾고 홈플러스를 품에 안았다는 것이다. 

KKR은 어피니티와 컨소시엄을 꾸린 뒤 국민은행과 산업은행을 인수금융사로 내세워 홈플러스 인수전에 뛰어들었는데 MBK가 단독으로 나서 글로벌 공룡을 무너뜨렸다.

그동안 토종 자본은 외국계 사모펀드와의 인수전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MBK가 일궈낸 인수전 승리는 국내 자본시장의 판도 변화를 알리는 일대 사건으로 여겨졌다. 

한앤컴퍼니는 모건스탠리PE의 아시아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지냈던 한상원 사장이 지난 2010년 설립한 회사다. 

대표적인 투자로는 코아비스 인수가 꼽힌다. 한앤컴퍼니는 지난 2012년 대우그룹 자동차 부품 계열사였던 코아비스를 인수해 대대적인 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외형만 간신히 유지하던 회사에 전문 경영인을 투입하고 폭스바겐 등 새로운 거래처를 뚫어 납품량을 늘렸다. 이 결과 2012년 79억원이었던 코아비스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122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설립 후 채 2년이 안 되는 기간에 코아비스를 비롯해 코웰이홀딩스, 대한시멘트, 쌍용양회 등에 투자하며 광폭 행보를 보인 한앤컴퍼니는 지난해 '빅딜(Big Deal)'도 성사시켰다. 

지난해 12월 한국타이어와 함께 미국 비스테온이 보유한 한라비스테온공조 지분 69.99%를 3조8854억원에 공동 인수했다. 이 중 한앤컴퍼니는 투자금 2조8035억원을 들여 지분 50.50%를 보유하게 됐다. 

현재 MBK와 한앤컴퍼니 외에도 다수의 PEF들이 대한전선, 아이리버, 버거킹, LIG넥스원 등이 유명 브랜드 기업의 주인으로 있다. 

◇두 얼굴 사모펀드, 평가 갈리지만 성장 가능성 높다

자본시장연구원이 투자 회수가 끝난 기업 9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모펀드가 인수하던 시점에 평균 1070억원이던 기업 가치는 투자 회수 시점에 평균 2000억원으로 크게 올랐다. 

그만큼 사모펀드가 개입하면 기업 가치 제고 효과가 뚜렷하다는 방증이다. 

박 연구원은 "국내 모험자본의 성과를 PEF를 통해서 살펴보면 PEF 투자 이후 피투자기업의 성장성과 효율성 증가 등 경영성과가 개선되고 있다"며 "구조조정을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통해 기업효율성 개선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전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모펀드에 인수당한 회사 중 일부는 지나친 구조조정으로 대량 해고의 칼바람을 맞기도 한다. 

또 사모펀드가 국내 기업을 인수 한 뒤 외국 기업에 고액을 받고 되파는 과정에서 '국부 유출'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사모펀드는 경영권 매각을 통해 일반적인 투자보다 훨씬 고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 사냥꾼', '먹튀'라는 오명이 억울할 수도 있다"며 "단 경제 논리가 아닌 사회적·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PEF의 지나친 구조조정과 분할 매각 등은 국민 정서와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명암(明暗)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사모펀드시장가 더 성장할 것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자본시장연구원 송흥선 연구위원은 "향후 사모펀드시장의 발전 전망이나 적정 발전 수준에 대한 논의는 국민경제의 모험자본 수요나 금융구조의 변화 속도 등을 감한해 이뤄져야 한다"며 "앞으로 저성장 극복을 위한 구조개혁이 지속되고 급속한 고령화로 금융구조와 금융순환이 빠르게 변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사모펀드시장의 빠른 성장이 예산된다"고 분석했다. 

정부도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의 하나로 M&A 시장 활성화를 들며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를 대폭 풀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4일 '금융투자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사모시장 활성화를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사모펀드 시장 확대를 위해 앞으로 모든 증권사에 사모펀드 운용을 허용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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