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7일 이른 아침부터 휴대폰 제조사들과 이동통신 3사 CEO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 발효로 소비자들이 오히려 고통을 받고 있다는 지적을 의식한 때문이다.
단통법 발동으로 휴대폰 가격이 싸지기는 커녕 예전보다 훨씬 비싸졌다는 원성이 쏟아지면서 '시장 혼란만 일으키는 단통법을 폐지하라'는 비난마저 등장하자, 이를 서둘러 진화할 필요가 높아졌다.
현상태를 방치하다간 자칫 '단통법=정부의 정책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정부 행보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관건은 '정부의 노골적인 시장개입'에도 과연 휴대폰 가격이 소비자들의 요구수준만큼 낮아질 것인가라는 점이다.
현재로선 ▲내수보다 훨씬 큰 휴대폰 해외시장에 대한 악영향(제조사) ▲과도한 보조금 지급으로 인한 수익악화 단절(이동통신사) ▲노골적인 시장개입에 대한 명분 약화(정부)가 서로 팽팽하게 어울어져 있어 이렇다할 결과물이 나오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날 간담회에서는 단말기 출고가 인하나 분리공시 도입에 대한 논의가 직접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출고가가 외국에 비해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등 우회적인 압박이 지속됐다.
특히 정부는 이통사와 제조사들에 빠른 시일 내 각 사별로 단통법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해법을 내놓을 것을 주문하며,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제조사들과 이통 3사에 커다란 부담을 지었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 앞서 모두 발언을 통해 "수요자 입장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통사·제조사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며 "이통사와 제조사가 기업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특단의 대책'을 내릴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기도 했다.
◇아이폰6, 일본에선 공짜…한국에선?
오는 24일 국내에서 예약판매에 들어가는 애플의 아이폰6와 아이폰6플러스의 경우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할 판이다.
아이폰6 16GB 모델의 국내 출고가가 80만원대 초반 정도로 예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통법 시행으로 보조금을 최대(30만원)로 받더라도 국내에선 50만원대 후반에 구입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보조금이 현재 갤럭시노트4와 비슷한 수준의 10만원 초반대로 실리게 되면 국내 소비자들은 70만원 가량을 내고 사야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모델을 '공짜(2년 약정 신규·번호이동 가입시)'로 살 수 있고, 미국에서는 199달러(약 21만원)만 내면 된다.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4도 마찬가지다. 갤럭시노트4의 국내 출고가는 95만7000원. 현재 이통 3사의 월 10만원 이상 요금제에 가입해도 11만~12만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즉 실구매가는 83만5000~84만7000원 수준.
미국과 중국의 경우 갤럭시노트4 출고가는 각각 95만4000원, 92만3000원로 국내 가격과 별 차이가 없지만, 이통사에서 팔려나가는 금액차는 50만원 이상이 난다.
미국 AT&T에서는 갤럭시노트4를 2년 약정으로 하면 299.99달러(약 32만원)에 살 수 있다. 영국 O2는 2년 약정에 월 33파운드(약 5만6500원)짜리 요금제를 선택하면 129.99파운드(약 22만3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시장조사 기관 애틀러스리서치앤컨설팅은 "일본 이통 3사간 아이폰 가입자 확보를 위한 경쟁이 본격화됐다"며 "지난해 처음으로 아이폰을 도입한 도코모는 타사의 아이폰 가입자를 유치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KDDI와 소프트뱅크는 기존 가입자의 기기변경을 적극 지원하며 이탈을 방지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제조사들의 논리지만 정황상 국내와 해외에서 동일한 제품의 소비자 구매가격이 차이가 나는 것은 출고가 때문이 아니라, 이통사의 보조금 차이에 기인한다는 이야기다.
◇단통법 효과 느끼기 전까지는 '출고가 인하' 압박 지속될 듯
구체적인 사정이야 어떻든 단통법의 드라마틱한 효과가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제조사들은 출고가 인하 압박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보조금 상한선 자체가 30만원으로 한정된 상황에서 단말 가격 자체를 내리지 않는 한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혜택의 폭에 한계가 있기 때문.
하지만 제조사들은 출고가 인하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다.
특히 해외시장 판매 비중이 높아 글로벌 가격경쟁력이 중요한 삼성전자는 더 그렇다. 국내 시장은 전체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해외 시장의 가격을 책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내에서 가격을 내리기 시작하면, 해외 시장에서도 가격 인하 압박이 줄지어 들어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단말기 출고가를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가뜩이나 3분기 IM(IT·모바일) 부문 영업이익이 전분기 4조원대에서 1조원 후반대로 급추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기 상황. 이미 단통법이 시행 이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국내 스마트폰 판매량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날 삼성전자 대표로 참석한 이상훈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사장)도 "전체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단말기 출고가 보다는 얼마에 살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출고가 인하가 이뤄지기는 어렵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했다.
◇전문가들 "차라리 이동통신 요금인가제와 휴대폰 보조금 상한선 폐지하라"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16일 열린 '단통법 해법 모색 토론회'에서 통신사 간 보조금 경쟁을 규제하기 보다 요금 경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단통법은 요금인가제 하에서 보조금 경쟁을 하지 못하게 했다"며 "요금인가제를 폐지해 통신사 간 요금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신요금 인가제는 정부주도의 담합과 다름없다"며 "요금인가제는 신규 사업자 보호를 목적으로 20년 가까이 유지된 만큼 원점에서 요금인가제의 타당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는 "통신사에 비해 대리점들은 상당한 고통(비용)을 지불할 것이며 외국계 제조사와 비교해 국내 제조사의 역차별도 발생한다"며 "'주간 공개 고정가격제(보조금 공시)'의 결정적 결함을 제거하지 않는 한 시간이 가도 단통법 참사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조금 상한선을 철폐에 준하는 수준으로 대폭 확대하는 등의 단기적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며 "이통사들의 가격경쟁을 제한하는 규제를 푸는 등 통신가격 경쟁환경을 조성하는 쪽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