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폴리에스테르 가공 원료인 테레프탈산(TPA)를 수출한 물량 가운데 중국으로 수출한 물량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중국 의존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이런 높은 중국 의존도는 그동안 중국 시장의 수요가 뒷받침됐다는 것을 방증한다.
최근 중국에 수출하는 TPA 물량이 급감하고 있다.
2010년 중국에 TPA를 300만t 수출하던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2012년 260만t, 지난해 170만t을 수출했다. 올해 8월까지 수출한 물량은 50만t에 불과해 올해는 80만t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4년 새 TPA 대중 수출 물량이 4분의 1 토막으로 쪼그라든 것. TPA를 생산하는 효성은 대중국 수출 급감 등의 이유로 공장 가동률을 낮췄다. 2012년 97.88%였던 가동률이 지난해 93.44%, 올 상반기 81.14%를 찍었다.
효성 관계자는 "효성은 타이어코드 등 다양한 제품군에 TPA 물량의 절반가량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편"이라며 "TPA 물량을 대부분 중국 시장에서 소비하는 기업은 상황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TPA를 생산하는 곳은 효성 이외에 태광산업, 롯데케미칼 등이 있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차이나 스톰' 한가운데 서 있다.
그동안 중국 시장은 석유화학 업계의 '캐시카우(cash cow·현금 창출원)'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목숨 줄을 죄고 있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흥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동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등 신시장 진출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2일 한국무역협회와 현대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대중국 수출 비중은 2000년 10.7%에서 지난해 26.1%로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석유화학 제품의 경우 전체 물량 가운데 중국에 48.6%를 수출할 정도로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다.
대중국 수출이 부진할 경우 한국 경제가 기반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차이나 리스크'가 엄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p 하락할 경우 국내 총 수출은 1.7%p, 경제성장률은 0.4%p 하락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석유화학업계는 현재 맨몸으로 '차이나 리스크'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7월 석유제품과 석유화학 중간원료의 대중 수출은 각각 전년 동기 대비 24.7%, 6.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석유화학 합섬원료는 이 기간 동안 전년 동기 대비 43.5%나 급감한 것으로 조사됐다.
석유화학 합섬원료인 카프로락탐이 대표적인 사례.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카프로락탐의 대중국 수출 물량은 1만9008t, 2011년 2만752t, 2012년 2만9648t로, 증가추세에 있다가 지난해 수출 물량이 32t에 그쳤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는 수출 물량이 '제로(0)'다.
차이나 리스크가 현실화하는 것은 중국이 자체 생산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중국의 석유화학 관련 공장 증설 등으로 합성수지 및 합성고무 등 주요 석유화학 제품 자급률은 2002년 44.5%에서 지난해 68.8%로 크게 상승했다. 그에 따른 영향으로 한국의 대중국 석유화학 수출 증가율은 2002년~2008년 평균 20.0%에 달했으나 2009년~2013년 평균 8.0%로 하락했으며 올해에는 0.5%에 불과한 수준이다.
여기에다 중국의 성장 속도 둔화로 수입수요가 감소한 점도 가세하고 있다.
2000년~2008년 연평균 10.6%로 성장했던 중국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8.8%로 성장 속도가 둔화됐다. 또 국제통화기금(IMF)는 최근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7.6%에서 7.4%로 하향 조정했으며, 내년 전망 역시 7.3%에서 7.1%로 하향 조정했다.
한중 간 기술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가속요인.
실제로 한중 간 산업 내 무역 비중은 2000년 41.7%에서 지난해 53.8%로 증가한 반면, 산업 간 무역 비중은 58.3%에서 46.2%로 축소됐다.
조규림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과거 중국의 기술력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때는 중국은 주로 노동집약적 산업에, 한국은 자본집약적 산업에 집중했다"며 "예를 들어 중국은 섬유 제품을 수출하면, 한국은 기술력을 요하는 휴대폰을 수출하는 식이어서 '다른' 산업 간 무역 비중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최근 중국의 기술력이 향상되면서 중국도 한국과 같이 휴대폰을 수출하는 상황"이라며 "이에 따라 '동일' 산업 내 무역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대중국 수출 부진이 구조적이라고 진단한다. 중국의 경기둔화 및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결과물인 만큼 과거 수준으로 회복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해법은 중국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아세안, 중동 등 신시장 공략을 통한 수출 지역 다변화 노력과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장상식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석유화학 제품의 대중국 수출 물량이 급감하는 동시에 단가도 하락하고 있어 사실상 이중고를 겪고 있는 상황"이라며 "장치 산업이라는 석유화학 업종의 특성상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손해를 보면서 공장을 돌려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장 연구위원은 "단기적으로 봤을 때 대중국 수출 물량 급감이 구조적 요인에 따른 것인 만큼 쉽사리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중장기적으로 석유화학 제품 가운데 공급과잉이 처해 있지 않은 것들이나 중국의 틈새시장을 노려 수익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규림 선임연구원은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예전부터 서서히 줄여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패착"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신흥국으로 부상 중인 아세안 및 중동 국가 진출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 산업구조 고도화에 대응하기 위해 범용 제품보다는 고부가․고기술 제품 개발에 주력해 중국 제품과의 차별성을 유지할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