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지성(38)은 물 같은, 공기 같은 배우였다. 드라마 '카이스트'(1999)로 데뷔한 지 벌써 16년차. 다수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고 '뉴하트'(2007~2008) '보스를 지켜라'(2011) 등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전에는 나에 대한 배려보다는 남을 위한 배려를 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배우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그 힘이 곧 시청자에게 전달이 되는데, 연기하면서도 계속 상대방을 배려하기만 했었죠."
최근 종영한 MBC TV 드라마 '킬미, 힐미'(극본 진수완·연출 김진만, 김대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지성이 지난 17일 인터뷰에 나섰다. 그는 '킬미, 힐미'에서 7개의 인격을 가진 '차도현'을 연기하며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남자배우로서는 드물게 틴트(립스틱의 한 종류)를 완판시킨 사건은 지성이 이 드라마로 얼마나 주목받았는지 증명해준다. 극 중에서 차도현의 여고생 인격인 '요나'가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저는 저를 사랑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를 사랑할 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자신감도 얻고 오히려 다른 생각 안하고 제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지성이 직접 부른 OST '제비꽃'은 극 중 모든 등장인물에게 불러주는 노래이자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너는 아주 평화롭고/창 너머 먼 눈길/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아주 한밤 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제가 직접 선택한, 저 스스로에게 불러주기도 하는 노래에요. 너 그동안 잘했어, '킬미, 힐미'를 통해서 많은 분들에게 즐거움과 행복, 위로를 전달했을 거야. 네 할 일은 이제 다 했으니 쉬어라. 이런 의미였죠."
처음부터 지성에게 '킬미, 힐미'의 대본이 간 것은 아니었다. 이 배우, 저 배우를 거치다 뒤늦게 지성에게 작품이 전달됐다. 7개의 인격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7개 인격을 연기해야 했지만 이상하게 부담은 되지 않았어요. 각각의 캐릭터마다 어떻게 연기할지, 어떤 메시지와 진심을 담을 건지 확고하게 생각해 뒀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시간이 없어서 버릴 건 버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한 명, 한 명을 다 정성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소중하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진 7개의 인물이었지만 그 원점은 '차도현'이라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살을 하려는 나약한 '요섭', 항상 발랄한 여고생 '요나',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아버지 역할의 '페리박', 분노가 치밀었을 때 나타나는 '신세기', 학대받는 7살 어린이 '나나', 나나의 아버지 '미스터 엑스'. 이 모든 등장인물이 각각 차도현을 설명했다. 그래서 지성은 요나가 등장하는 웃긴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요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왜 이런 성격을 가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7개의 인격 중 요섭이가 많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요섭이를 연기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아이들, 나약한 생각을 하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전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에 한 불어 대사가 생각이 나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프랑스 명언인데요. 그걸 불어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킬미, 힐미'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는 아동학대였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기억으로 차도현의 인격은 일곱 개로 분리됐다. 지성은 아역 배우들과 함께 학대당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을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꼽았다. 실제상황처럼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실신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요즘 안 좋은 일이 많아요. 어린이집 사건도 그렇고. 아이들은 아낌없이 사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을 주제로 다루다 보니 우리 드라마에도 자부심이 느껴져요. 앞으로도 단순히 재미 위주의 막장 드라마보다는 정말 이야기를 갖고, 사람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드라마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킬미, 힐미'로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촬영하면서 격한 감정연기를 계속했다. 역할에서 빠져 나오기 쉽지 않다. '로열 패밀리'(2011) '보스를 지켜라'(2011)를 한 달 간격으로 연달아 촬영하면서 실제로 우울증에 시달린 경험도 있다. 특히 '보스를 지켜라'에서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차지헌'을 연기한 여파가 컸다.
"그 때 하와이에 너무 가고 싶었어요. 뭔가 해소하고 치유가 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혼자 떠났죠. 근데 아침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가서 잠깐 누웠는데 꼬박 하루를 잔 거예요. 그때 그 '더러운' 기분은 잊을 수가 없어요. 외롭고, 아무도 없는데 심지어 하와이고."
그러나 다행히 이번에는 괜찮다. 지성은 가족 덕분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3년 탤런트 이보영(36)과 결혼해 오는 6월22일 아빠가 된다.
"'킬미, 힐미' 마지막 촬영 마치고 스태프와 중국집에서 술을 한 잔 했어요. 먹고 마시는데 내 마음을 어디다 둬야 하지 싶으면서 슬프더라고요. 그리고 집에 갔는데 와이프가 '잘했어? 잘 마쳤어?' 물어보는데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그렇게 울다가 자고 일어났는데 너무 든든했어요. 와이프가 나를 지켜주는 듯한 느낌이었죠. 절대 나는 외롭지 않구나.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우울증이고 뭐고,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상대역을 맡은 황정음(30)과는 '비밀'(2013) 이후로 두 번째 함께 한 작품이었다. 비밀에 이어 '킬미, 힐미'에서도 찰떡같은 호흡으로 '믿고 보는 지성·황정음'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며 '지성이면 정음'이라는 귀여운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배우끼리 호흡은 무시할 수 없어요. 연기를 해도 상대배우가 받아주지 않으면 무의미해지죠. 그런 의미에서 정음이의 리액션에 감사하고 있어요. 정음이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인격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어요. 정말 훌륭한 배우죠. 다시 작품을 같이 할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좋은 작품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