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가운데 그간 남북간에 이뤄졌던 체육교류 사례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3일 발표한 '남북 스포츠 협력의 역사와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보고서에 따르면 스포츠와 관련된 최초의 남북관계 사건은 1964년 10월 당시 여자 육상 400m, 8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북한의 신금단 선수와 1950년 12월 홀로 월남한 부친 신문준씨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에서 14년 만에 15분간 짧은 상봉을 한 것이었다.
신금단 부녀상봉 이후인 10월27일 당시 민주공화당 소속 이만섭 의원이 대표발의해 여야의원 45명이 찬성해 국회에서 이산가족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김영삼·김대중 의원도 서명한 이 결의안에 며칠 후 홍명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방송을 통해 호응해왔고 11월7일에는 국회에서 찬반 논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이 호응한 사실 자체가 반공법 위반'이라고 반대, 해당 결의안은 국회 외무위원회에 계류돼있다가 제6대 국회가 끝나자 자동 폐기됐다.
1983년에는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북한이 1984년 LA 올림픽,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 서울올림픽 등 남북단일팀 출전과 이를 위한 남북체육대표단 회담을 제의했다.
남북한은 1984년 4~5월 3차례 회담을 개최했지만 아웅산 테러사건과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에 대한 시인과 사과 문제로 남북단일팀 구성 등 측면에서 협상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북한이 6월2일 LA올림픽 불참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남북체육회담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북한을 서울올림픽에 참가시키기 위한 스위스 로잔 남북체육회담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 하에 잇따라 개최됐다.
다만 북한이 대회명칭을 '제24회 올림픽 경기대회 조선 평양·서울 올림픽'으로 하고 개·폐회식은 서울과 평양에서 균등 실시하며 TV 중계권료를 배분해달라고 요구했고 우리측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결렬됐다.
결국 북한 올림픽위원회는 사실상 회담 중단을 선언했고 1988년 1월12일 서울올림픽 불참을 공식 선언했다.
노태우정부 시기였던 1990년 9월초에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됐고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한축구협회와 조선축구협회는 같은해 10월11일과 23일에 각각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1946년 해방 후 서울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렸던 경평(京平)축구대항전이 44년 만에 되살아났지만 이 통일축구대회는 정례화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1991년 2월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는 제4차 남북체육회담이 열려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4월, 일본 지바) 및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6월, 포르투갈) 남북한 단일팀 구성 참가를 위한 협상이 실시됐다.
그 결과 우리측이 선수훈련과 선수단장 문제에서 북한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양 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 코리아란 이름으로 아리랑을 국가 대신 부르면서 참가할 수 있게 됐다.
우리측의 현정화, 북한의 리분희와 유순복이 활약을 한 남북한 여자단일팀이 단체전 9연패에 도전한 중국을 3대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이 이야기는 2012년 영화 '코리아'로 제작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은 단일팀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올림픽 개막식에서 최초로 한반도기를 들고 코리아(Korea)란 이름으로 함께 입장했다. 이후 남북한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모두 7차례 공동 입장했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위한 남북공동응원단을 구성하는 데 합의했지만 우리측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단일팀 구성이 무산됐고 이후 단일팀은 구성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