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열음이 하프시코드로 들려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은 아날로그 감성의 정점이었다.
24일 오후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 리조트 콘서트홀에서 '제12회 대관령 국제 음악제'의 '저명연주가 시리즈' 두 번째 공연으로 펼쳐진 이 무대에서 그녀는 50분 내내 감수성이 출렁거리는 연주를 선보였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의 전신으로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낸다. 16~18세기 주로 연주되던 악기로 쳄발로로 불리기도 한다. 피아노처럼 현을 해머로 때리는 원리가 아니라 깃대 등으로 현을 튕겨 좀 더 청아하다. 언뜻 기타 소리 등이 느껴져서 좀 더 따듯하고 정겹다.
건반이 2단으로 돼 있어 폭이 좁은데 이날 손열음이 연주한 하프시코드는 기존 피아노에서 보기 힘든 다홍색 빛깔이라 언뜻 장난감처럼 보인다.
아날로그 소리를 귀에 머금은 채 그 형태를 지켜 보면 피아노 모양의 오르골이 떠오르기도 하다. 고음악 악기라 중간에 살짝 삐걱대거나 지글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역시 어딘가에 있는 소리의 근원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25일 오전 알펜시아 리조트 내 인티컨티넨탈 호텔에서 만난 손열음은 전날 연주에 집중한 탓에 피곤한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전날 들려준 하프시코드 소리처럼 총총했고 자주 웃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와 하노버국립음악대에서 하프시코드를 배우고 2008년 실내악 무대에서 하프시코드로 비발디의 '사계'를 들려준 적은 있으나 이처럼 홀로 나서 제대로 연주한 적은 처음이다.
'화려한 기교'의 대명사로 통하는 만큼 30개의 변주가 주도면밀하게 촘촘히 엮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녀와 잘 맞는 곡일 수밖에 없었다.
-전날 공연은 어땠나요?
"힘들었어요(웃음). 익숙하지 않은 악기라서요. 특히 제가 무대에서 위기 관리 능력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예민했죠. 하프시코드도 피아노보다 폭이 좁고 음이 깊지가 않아서 세밀하잖아요. 음정을 예민하게 내야 하는 악기를 연주하시는 분들을 이해가 되더라고요. 피아노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라서 예민하지는 않는데 그래서 좀 지금 좀 피곤해요(웃음). 악기도 조용해서 음악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털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긴장을 많이 했나요?
"악기가 겁나서요. 약한 악기라 튜닝도 잘 풀리고. 습기에 약해 대관령에 비가 많이 와서 특히 걱정이 됐어요.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 하프시코드가 처음 들어왔을 때 악기 중 하나인데 (하프시코드를 빌려준 쳄발리스트인) 허진선 선생님이 오래 연주를 하지 않으셔서 악기가 약해진 상태였어요."
-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을 하프시코드로 들려주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사실 시대 악기나 연주에 관심이 많지는 않아요. 그 시대 사람들은 그 당시 발전한 악기가 없어서 그 시대 악기로 연주한 것인데 피아노를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특이한 곡이라서요. 변주곡은 기악곡의 꽃이에요. 성악은 변주곡이 없잖아요. 악기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죠. 30개가 넘는 변주곡의 면면을 하프시코드가 풀어놓은 것이라서 이 악기로 해보고 싶었어요. 일단 다른 곡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해볼 생각은 없고요."
-하프시코드는 페달이 없어 셈여림을 전달할 수가 없죠.
"네 맞아요. 연주자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웃음). 음이 나오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야하죠. 연주자의 역량을 간소화시키는 악기인데 그게 매력이에요. 그래서 내려놓게 되는 악기죠."
-연주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악기가 없는 거요(웃음). 제가 본래 연주 전에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죠. 악기가 약해서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연습도 힘들었고요. 나흘 정도 연습했어요. 그리고 피아노에 익숙헤서 본래 다이내믹하게 연주를 하는데 하프시코드는 치는 그대로 소리가 나오니 힘 조절하기도 힘들었죠. 그리고 두 단으로 돼 있어 수월 줄 알았는데 오른손이 위에 왼손이 밑에 있으니 헷갈리더라고요. 오른팔이 계속 위에 있으니 팔이 아파 힘들기도 했고요. 벌 받는 기분도 들더라고요(웃음)."
-소리가 참 다양하게 나더라고요.
"리허설 할 때는 그렇게 들렸는데 본 공연에서는 객석이 차서 그 소리가 어떻게 들릴 지 저도 궁금했죠. 소리를 5개 정도 다양하게 낼 수 있어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면 철학적인 곡이 되는데 하프시코드로는 화려한 곡이 되죠."
-연주를 끝내고 마지막에 미소를 지었어요.
"이제 진짜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웃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생각을 꿈 꿨는데 마침표를 찍은 느낌이었죠. 좀 더 진지하게 배우려면 시간이 더 들 것 같아요."
-'대관령 국제 음악제'는 4번째 방문인가요? 작년에는 음악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마스터 클래스와 레슨을 진행하기도 했는데요.
"제게는 홈커밍(손열음의 고향은 강원 원주다)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마스터 클래스와 레슨은 제대로 지도 편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수준이죠(웃음)."
-특히 강원도에서 음악하는 친구들은 열음 씨를 롤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시작 단계에요. 한참 활동을 하고 있어 완성형이 아니죠. 제가 많이 부족하니 혹시나 그런 친구가 있다면 저 말고 정말 거장 분들을 보고 배우라고 하고 싶어요. 정말로 많이 부족하거든요.
-음악제 기간 임지영(지난 5월 말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씨와 협연을 하시는데 지영 씨가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 뮤지션과 함께 하하게 돼 정말 기쁘다고 하더라고요.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정말 세계적인 수준이에요.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이렇게 단 시간에 1등을 한다는 것이 놀라워요. 한국 사람들은 취향을 잘 타고 나는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중국은 그렇게 큰 나라인데도 연주자들은 중국 성향이 있고, 일본도 일본 특유의 취향이 있어요. 한국은 그런데 개개인이 다 다르죠. 그런 부분이 음악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리고 집념이 있고 열심히 하는 것이 바이올린을 잘 하는 비결 중에 하나가 아닐까요."
-글 잘 쓰시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 책(에세이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도 펴냈는데 혹시 연주가 끝날 때마다 글로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시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음악회가 끝나고 나면 무아지경이 돼요. 그 자체를 즐기고 싶은 거죠. 글로 쓰면 다시 생각을 하고 너무 세세하게 풀어내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정경화 선생님이 시간이 지나면 연주회 기억이 잘 남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글로 남겨보면 의미는 있을 것 같아요."
-지난해 JTBC 드라마 '밀회'에서 '오혜원'(김희애)의 대사 "손열음이 대단한 건 뜨거운 걸 냉정하게 읽어내서야. 그래야 진짜 뜨거운 게 나오지"가 내내 화제가 됐습니다.
"본방송으로 보고 있었는데 정말 놀랐어요. 제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몰랐거든요. 정말 감사하게도 '밀회'의 안판석 감독님이 제가 쓴 글을 좋게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작년 공연 때 안 감독님과 정성주 작가님을 초대하기도 했어요. 작가님이 정말 포인트를 잘 잡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제가 작업하는 방식이 머리로 계산을 많이 하고 그려요. 그리고 무대에 나가서는 자유롭게 하죠."
-이번 하프시코드 연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아요. 피아노에 이런 식으로 적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도 많이 떠올랐고요. 예를 들면 피아노보다 한정된 키보드에서 패시지(중요한 멜로디 라인을 연결하는 악곡의 짧은 부분)을 생각하다 보니 '바흐가 원했더 것이 이렇게 화려한 것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그렇게 세부적인 음악적 내용과 작곡가의 의도가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