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된지 한 달이 지난 가운데 삼성이 기본적인 경영 현안을 챙기며 '총수 부재' 충격을 최소화하고 있다. 미룰 수 없는 현안은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안정에 힘을 쏟겠다는 계획으로 풀이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16일 "삼성이 총수 부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최근 한 달 동안 국내외 현안을 풀어나가며 안정화에 힘쓰고 있다"며 "경영정상화와 총수 구하기라는 '투트랙 전략'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계열사별 자율경영 시대에 돌입한 삼성은 논란의 축이 됐던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 등을 상대로 로비나 민원 등을 하는 대관업무 조직을 폐지키로 했다.
지난 15일부터 14개 계열사는 대졸 신입사원(3급) 상반기 공채 모집에 들어갔다. 이번 공채를 마지막으로 삼성의 그룹 차원 공채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야기된 정경유착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10억원 이상의 모든 후원금과 사회공헌기금을 이사회에서 의결토록 하는 등의 방침도 내놨다.
위기를 맞았지만 이번 기회에 흠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정리하고 새출발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미전실을 이끌었던 최지성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차장(사장)을 비롯해 미전실 내 7개 팀의 팀장이 일괄 사임한 것도 이를 위한 일환으로 해석된다.
다만 주요 계열사 사장단의 자리는 변동이 없을 것으로 보여 안정에 힘쓰겠다는 포석이다. 삼성 주요 계열사는 오는 24일 정기주주총회를 개최하는 가운데 이사회를 거친 삼성전자와 물산·생명 등의 안건에는 사내이사 변경이 없다.
신규로 사내이사를 선임하지 않고 기존 4인 경영체제를 유지한다.
삼성전자는 이재용·권오현 부회장, 윤부근·신종균 사장이 사내이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삼성물산도 최치훈·김신·김봉영 사장과 이영호 부사장이 사내이사를 맡고 있다. 삼성생명은 김창수 대표이사 사장의 재선임과 최신형 부사장의 신규 선임 안건을 올렸다.
삼성SDI의 수장이 조남성 사장에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인 전영현 사장으로 바뀐 것은 '갤럭시노트7' 리콜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배터리 불량의 책임을 진 '신상필벌' 성격의 인사라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삼성SDI의 사장 교체를 시작으로 전 계열사에서 거침없는 인사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됐지만 올해는 이 부회장 부재로 인해 이 부회장이 복귀하는 시점까지 유보한다는 계획이다.
미전실 해체로 삼성의 단일체제의 컨트롤타워 기능이 사라지는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수장들을 중심으로 사업을 탄탄히 꾸려나간다는 포석이다.
글로벌 기업인 삼성이 각 관계사들과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것은 비효율적인 동시에 경영전략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최소한의 업무조율 및 협력 시스템은 가동돼야 할 필요성이 크다.
이런 점을 감안해 미전실 기능을 전자와 생명, 물산 3개사로 나눠 대체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예상이다. 이들 계열사의 수장이 그대로 남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전자와 생명, 물산이 전략·인사·기획 등 기존 기능을 확대·강화해 전자계열사와 금융계열사, 바이오계열사 등을 이끌어갈 것으로 보인다. 계열사 자율경영을 표방하고 있지만 축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계열사별로 이사회 중심 경영활동이 강화될 예정이지만 업무가 중첩되거나 조율이 필요한 경우 전자·생명·물산의 경영지원조직이 주도적으로 교통정리에 나서는 것이다.
#삼성전자 지주사 전환 진행 중
그다음 단계로 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해, 장기적으로는 이런 기능을 지주회사 산하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도록 할 계획이다.
이를 반증하듯 이상훈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사장·CFO)은 지난 14일 "삼성전자의 지주사 전환 검토는 그룹의 이슈와 관계없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고, 결과는 5월말에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삼성전자 지주사와 삼성물산의 합병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 삼성전자의 지주사가 최우선 과제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삼성전자가 지주사와 사업회사로 나뉘게 되면 지주회사는 자사주를 통해 사업회사에 대한 지분율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미전실 없이 지주사에서 전 계열사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재계에선 미전실 해체가 이뤄지면 삼성은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삼성공화국'이라는 비판도 비켜 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인적 분할이 진행되면 기존 회사 주주들은 분할된 회사의 신주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분 비율만큼 받을 수 있다. 또 현재 의결권이 없는 삼성전자 자사주 지분은 사업회사에 대한 의결권을 갖게 된다.
상법상 자사주는 회사가 보유한 주식이기 때문에 의결권이 없지만 관계사끼리 주식 교환이 이뤄질 경우 의결권이 생긴다는 점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전자를 홀딩스(지주사)와 사업회사로 나누고 지주회사를 삼성물산과 합병한 후 금산 분리를 위해 홀딩스와 금융 지주회사를 설립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위한 첫 단추가 삼성전자의 지주사 전환이라는 얘기다.
이는 삼성전자 주주인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전자에 요구해왔던 부분과도 거의 일맥상통하는 시나리오다. 이 부회장의 복귀까지 안정적으로 회사를 끌고가면서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준비까지 해놓겠다는 의도다.
재계 관계자는 "상황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측됨에 따라 삼성이 내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부분을 처리하겠다는 계산이 선 것으로 보인다"며 "총수 부재 상황에서 회사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한 플랜B에 돌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