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서(74) 명인은 나이가 무색하게 눈이 반짝거린다. 딸 이주희 교수(51·중앙대 무용)의 효심을 칭찬할 때는 더욱 빛난다.
이 교수는 "그런 말씀은 하지마라"며 한 명인을 거듭 말린다. 어머니의 명성에 누가 될세라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종종 짓궂은 농담을 하며 살뜰한 애정을 과시한다.
이들 모녀 교감의 중심에는 춤이 있다. 이 교수가 한 명인의 전통춤을 계승해온 무대인 '모녀전승(母女傳承)'이 벌써 10회째를 맞이했다. 2002년 이주희무용단 설립과 동시에 기획·연출·안무해온 공연 시리즈다.
서울 창덕궁 앞 국악길에 있는 '한순서 전통 춤연구소'에서 만난 모녀는 "시작했을 때 10회까지 공연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감격스럽다"며 입을 모아 웃었다.
한 명인은 6·25동란 피란시절 부산의 김동민과 가야금 산조의 명인 강태홍에게 한국 전통춤과 국악을 배웠다. 17세에 자신의 이름을 건 '한순서 전통춤 연구소'를 개소, 이듬해에 개인발표회를 열었다. 그해 한국 전통춤의 거목 이매방(1927~2015)과 제1회 춘향뎐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을 즉흥 듀엣으로 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이후 전통춤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녀는 "상당히 마음이 울컥하다"고 털어놓았다. "여기까지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감동이 크다. 내 친구들만 봐도 무용을 기를 쓰고 발표하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옆에 있는 딸 때문"이라며 뿌듯해했다.
이 교수는 2000년 귀국 전 유학한 일본에서 '전승'에 대한 테마를 주로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가부키, 노 등의 공연이 세습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역시 조선후기, 근대 초까지 세습이었는데 전쟁 등 사회적인 변화로 인해 그런 전통이 소멸됐다. 어머니처럼 '살아 있는 자료'를 전승해나가고 싶었다."
전통춤의 다양한 레퍼토리 부활을 위한 마음도 있다.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된 종목 위주로만 전승자가 생기는 추세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이 점이 안타깝다.
한순서는 "무용하는 사람은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악기도 만지고 소리도 해야 표현이 풍부해지는데, 지금은 한 분야만 하니 아쉽다"고 했다. 이주희도 "전통춤이 일률적으로 정해지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긴다. 지금은 진정한 의미의 광대, 쟁이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12, 13일 대학로 아르코극장 대극장에서 열리는 이번 '모녀전승'이 의미 깊은 이유다. 모녀가 다양한 전통춤을 선보인다. 인천시 무형문화재 범패·작법무(나비춤) 보유자인 일초 스님의 범패 소리의 웅장함과 함께 강태홍류 승무를 이어가고 있는 한순서 발디딤새를 볼 수 있는 '승무'도 물론 있다.
여기에 동적이고 화려한 춤인 '화관무', 한순서가 직접 춤을 추며 전수하고 있는 '살풀이', 날렵하고도 비장미 넘치는 '장검무', 무을농악의 전투적인 북놀이의 움직임과 상장고의 가락이 어우러진 '상장고', 경쾌한 밀양아리랑을 배경으로 동심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초립동' 등 풍성한 상차림이 마련됐다.
특히 '초립동'은 이 교수가 5세 때 밥상 앞에서 한 명인에게 처음 보여준 춤이기도 하다. 한 명인은 이 교수가 춤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면 했다. 너무 고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전자전보다 애끓고 진득한 것이 모전자전, 모녀는 손톱으로 서로를 콕 찌르면서도, 꼭 끌어안는 사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음을 툭툭 던지는 부자보다, 모질더라도 마음을 끈질기게 던지는 사이가 모녀다.
이 교수는 그래서인지 한 명인의 춤 유전자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70년대 초 한 명인이 이화여대 앞에 춤 연구소를 차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문밖에 밥만 놓아두고 가던 이 교수가 문틈 사이로 익힌 춤은 그 어느 학생보다 뛰어났다.
한 명인은 "당시에는 전통춤을 배우려는 학생이 많았다. 180명이 학원을 가득 채웠으니. 그 중에서도 주희가 소질이 있었다. 주변에서 주희도 가르치라고 이야기를 해서 연습실에 들이기는 했는데 양심상 딸을 잘 가르칠 수는 없었다"며 웃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돈을 내고 배우러 온 이들인데, 주희는 내 딸인 데다 무료로 학원에 오니. 저 구석에 세우고 '이래라 저래라' 소리도 못했다. 근데 내 자식이지만 끼가 남달랐다."
이 교수는 "어머니가 지나가면서 아무 말 없이 팔을 치고 갔다. 좀 더 위로 올리라는 뜻이었지. 그렇게 춤을 배워나갔다"고 기억했다.
한 명인은 모녀가 무대에 서면 좋은 점이 많다며 싱글벙글이다. "눈짓만 하면 서로 다 안다. 입모양만 봐도 서로 통하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놓여 춤을 더 잘 출 수 있다. 부모라고 수그러드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한 명인은 1녀2남 중 장녀인 이 교수를 더 없이 믿음직하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이 교수는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좋으면서도 부담스럽다. "아무리 춰도 어머니랑 똑같이 춤을 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녀전승' 첫해에 어머니와 같이 춤을 췄는데 친구가 말리더라. 아무리 춰도 어머니처럼 못 춘다는 거지. 역시 어머니의 곰삭은 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더라. 이후 작년 9회 때 '쌍승무'를 출 때까지 한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다른 춤을 각자 춘다."
한 명인은 '모녀전승'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가고픈 바람이다. 힘 닿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어머니가 남의 눈에 추레해 보이는 건 싫다. 끊고 맺음을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한 명인은 "이런 무대를 이어줘서 무엇보다 딸에게 고맙다"고 흡족스러워했다. 한국공연예술센터(http://www.koreapac.kr), 인터파크 (www.interpark.com), 전석 3만원. 02-798-7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