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공연 끝으로 폐기, 거장 윌슨 '해변의 아인슈타인'

  • 등록 2015.10.25 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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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빛이 있었다. 현대 공연예술의 거장 로버트 윌슨(74·미국)에게도 마찬가지다. 최전선의 실험 오페라이자 그의 대표작인 '해변의 아인슈타인'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일직선 '빛의 기둥'이다.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1879~1955)의 "빛이야말로 모든 것의 척도"라는 말이 오버랩된다.

윌슨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 "이 작품에서 빛은 하나의 배우로서 기능한다"고 23일 밝혔다.

작품 초반에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기차의 움직임이 빛으로 확장된다. 아인슈타인 역시 기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며 윌슨은 흰종이에 펜으로 선을 그리며 자신의 작품 구상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기차가 들을 가로질러갈 때에 대해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사람들이 기차와 수평으로 볼 때는 기차의 형태가 보이지만 기차를 위에서 보게 된다면 하나의 직선처럼 보인다. 난 그것을 빛의 바(ba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작품에서 조명은 작품이 만들어진 다음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계획할 때부터 작품의 구조 단계에 들어간다. 빛을 파장의 이미지로 생각했다."

공연 속에 나오는 재판장 위에 걸린 빛의 대표적인 예다. 그 재판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침대가 있는데 그 침대도 수평의 '빛의 기둥'으로 작용한다. 이 침대가 공연 후반 다시 등장하는데 어둠 속의 빛 하나로만 형상화된다. 앞서 말한 대표 이미지가 바로 이 장면이다. "수평이었던 것이 점차 수직이 되는데 조명이 작품의 구조적인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내게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빛이다. 들을 수 있게 하고 볼 수 있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공간도 존재할 수 없다."

빛은 시간과도 같다. 윌슨은 "시간은 하늘에서 지구의 핵까지 가로지르는 성질인데 그것을 상징한다. 시간은 횡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의 무대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이다. 이것은 모든 건축물의 기본 요소"라고 지적했다.

모차르트 등 음악을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건반은 어떤 힘이 수직으로 압력을 가할 때 음을 낸다는 것이다. 윌슨은 "그것도 수평과 수직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힘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짚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 중 또 하나 중요한 건 우주선이다. 공중에 떠 있는 우주선이 점차 다가오는 건, 서구 화가들의 전통적인 척도의 방법으로 치환된다. "가까이에 있으면 초상화, 좀 더 거리를 두면 정물화, 아예 거리를 넘어서면 풍경화가 되는 식이다. 세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다."

현대 공연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윌슨의 작품이 처음 국내에서 선 보인 건 2000년 '바다의 여인'이다.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그의 작품은 이미지가 강조되는데 '해변의 아이슈타인'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가 1999년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작품'이기도 하다. 최근 '2015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최대 화제작인 베를린 앙상블의 '셰익스피어 소네트'도 그가 연출했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1976년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78)와 안무가 루신다 차일즈(75)가 협업한 작품이다. 1970년대 초반 윌슨이 뉴욕에서 밤새 12시간을 공연하는 '스탈린의 삶과 시간'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글래스가 이를 본 뒤 그를 찾아오면서 작품이 시작됐다.

4시간30분 가량의 공연으로 아인슈타인이 소재이나 특별한 줄거리는 없다. 음악, 무용, 조명, 무대 디자인 등 연극의 구성 요소가 동등하게 맞서는 이미지 공연을 보여준다. 초연 이후 이번이 세 번째 재제작이고, 지금까지 총 79회 공연됐다.

윌슨은 글래스를 만났을 당시 "'당신은 어떻게 음악을 작곡하는가?'라고 물었는데 연필을 꺼내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게 '연극은 어떻게 만드는가?'라고 반문했다. 나 역시 연필을 꺼내서 수학적 도식인 다이어그램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내 작품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거나 어떤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조 자체는 클래시컬하다. 하나의 주제와 그것을 변주한 것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음악을 작곡하는 것과 내가 연극을 만드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래스와 나는 나이대가 비슷해 동시대 예술을 목격했다. 공통적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됐다. 각자 가져간 지도(다이어그램)를 바탕으로 이미지와 그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맥락이 없고 이미지와 음악, 움직임 등의 변주와 확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라고 표현했다.

윌슨은 하지만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통적"이라고 답했다. "구조 자체가 (수학적이고 건축적인) 클래식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서구는 추상적인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람은 추상적인 방식으로 사고한다. 그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노을을 볼 때 그것에 대한 특정한 이야기가 없어도 색깔이나 시간에 따라 변화는 모습을 충분히 감상 할 수 있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의 노래 역시 노랫말을 통해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박자 자체나 숫자, 또는 음계 자체를 노래하는데 "그래서 우리 작품에서 듣게 되는 것은 음악 구조 자체"라고 전했다. "안무도 똑같이 구성했다. 내러티브가 없고, 수학적인 배열, 공간과 시간의 조합으로 구성했다."

이날 자리에 함께 한 차일즈는 윌슨과 글래스를 만나기 전까지 작곡가와 작업하지 않았다고 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윌슨과 작업하면서 흥미를 느낀 이유는 "수많은 변주가 실험적인 작업의 확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극장 밖에서 주로 공연한 그는 "윌슨의 작품은 극장 안에서 공간, 작곡의 전형적인 구도 등 클래식한 아이디어임에도 동시대 미학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며 "작품이 수학적으로 구조화됐기 때문에 무용수들도 숫자를 세면서 춤을 춘다. 음악을 움직임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서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윌슨은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비올레타 역을 맡은 한국의 소프라노 이명주와 작업했는데 그녀가 자신의 방식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며 웃었다.

 "음악 없이 움직임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거든. 그 다음 음악을 작업했다. 움직임과 음악은 두 개의 독립된 요소가 됐고 그 요소를 합치는 순간에 긴장이 발생한다. 우연에 의한 작업 방식과는 좀 다르다. 두 개의 요소가 인과 관계를 맺는 거지. 예를 들어 바그너의 엄청 빠른 속도의 음악에 움직임을 느리게 진행하면 상당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다른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묘사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윌슨은 결국 "아방가르드 의미는 클래식의 재발견"이라고 주장했다.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있는 건 길게 남는 것이다. 세대마다 이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발견할 것이냐가 문제다. 소크라테스는 한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교육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노출시키고 발견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역사동안 되풀이되는 인간의 방식을 재발견해나가는 과정이다."

초연한 지 약 40년이 된 작품이 지금 아시아에서 공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처음 탄생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세대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드릴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지난 40년 간 많은 것이 변했다. 사람들이 인지하는 방식 그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2012년 다시 제작돼 세계 투어를 한 이번 버전의 세트는 한국 공연을 끝으로 폐기된다. 그는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애초부터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며 "모차르트의 오페라 같지 않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을 거쳐 계속 반복될 것을 고려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공연장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건 정말 좋은 징조다. 젊은 사람들이 연극을 관람하러 간다는 것 말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본다. 극장은 가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젊은 관객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이날 개막한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시즌프로그램 '아워마스터'의 하나로 한국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568석 규모로 총 3회 공연인데 24~25일 공연이 매진됐다.

 '아워 마스터' 큐레이터로 '국제 공연예술계의 대모'로 통하는 프리 라이젠(65), 김성희(48) 예술극장 예술감독이 초청했다.

김 감독은 특히 "개인적으로 25년 전에 윌슨의 작품을 보고 충격이 커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며 "내가 이쪽 일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라고 말했다. "그런 분의 초기 작품을 한국에 보여주게 돼 기쁘다"며 "아시아의 관객들이 윌슨의 작품에 대한 영감과 놀라움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 지 기대가 된다"고 덧붙였다.



정춘옥 kimm1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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