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 홍향기(26)와 김채리(25)는 싱그러운 기운으로 넘쳐난다. 마치 여고생과도 같다. 하지만 무대 밖에서일 뿐이다.
무대에 올라서면 안면을 바꾸고 프로페셔널 무용수로 딴사람이 된다. 고난도 테크닉은 물론 성숙함이 배어나는 감정 표현에도 능하다. 전사 '솔로르'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다 배신당하는 인도 무희 '니키아'역을 처음 맡게 됐음에도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드라마틱한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인 '라 바야데르'의 주인공이다. 두 무용수 모두 이 작품으로 스타덤을 예고하고 있다.
김채리는 "니키아는 테크닉, 체력, 감정 표현을 다 갖춰야 하는 역이라 정신 무장 중"이라며 눈을 반짝거렸다. "여성성이 드러나면서도 여러가지 면을 가지고 있어 한 감정으로는 끌고 가기 힘든 캐릭터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른 작품보다 이미지를 강하게 잡고 있다."
무엇보다 슬프다고 무조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할 수 있는 연기가 필요하다. "힘들기는 하지만 연기 폭이 넓어질 거라는 기대감이 든다. 스토리텔링, 감정연기 등 요구되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싶다."
홍향기는 드라마틱 발레 주역 데뷔는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욕심이 난다. "'라 바야데르'를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과 감동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 전까지는 기술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라 바야데르'를 연습하면서 감정표현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자신은 연기력이 부족한 것이 단점이라며 "그간 그 틀을 깨지 못하고 테크닉에 주력해왔는데 이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끌어내고 싶다"며 의욕을 드러냈다.
'라 바야데르'는 187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마린스키 발레단이 초연했다. 국내에서는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15주년이던 1999년 처음 소개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이후 2001년 뉴욕 링컨센터·워싱턴 케네디센터·LA 뮤직센터 등 미국 3개 극장에서 이 레퍼토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라 바야데르'는 프랑스어로 '인도의 무희'를 뜻한다. 니키아와 솔로르, 니키아에게서 전사를 빼앗으려는 공주 '감자티', 무희에게 욕망을 품은 최고승려 '브라만' 등 신분을 초월한 남녀들의 사랑과 배신을 그린 대작이다.
대규모 무대 세트로도 유명하다. 150여명의 출연진, 400여벌의 의상으로 '블록버스터 발레'로 손꼽힌다. 대형 코끼리가 등장하고 숨 쉴 틈 없는 춤의 향연이 펼쳐지는 메머드급 화려함을 자랑한다. 높이 2m, 코 1m, 무게 200㎏짜리 코끼리의 웅장함은 특기할 만하다.
김채리는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지 않는 대작"이라며 "나를 시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자세다.
숨막히는 안무들의 연속이다. 1막에서 니키아와 솔로르가 펼치는 순수한 사랑의 파드되(2인무), 2막에서 배신의 절망감을 애절한 선율에 담아내는 니키아의 독무가 인상적이다.
여느 발레 작품들과 테크닉이 좀 다르다. 상체를 열어놓고 동작을 하지 않는다. 몸의 선이 보여야 한다. S라인으로 만들어야 해 세세한 근육을 써야 한다. 김채리는 "팔, 상체 등에서 평소 쓰지 않은 곳까지 써야 해 에너지 소모가 많다"며 "여성의 매력을 조금 더 드러낼 수 있게 허리 라인이 도드라져 신경쓸 것이 많다"고 전했다. 홍향기도 "상체를 똑바로 하고 1자로 만드는 것이 발레의 기본인데 평소와 달리 몸의 라인을 강조하다보니 체력 소비가 많다"고 공감했다.
니키아는 발레 캐릭터 중 가장 다채롭다. 1막에서는 행복한 사랑에 취한 관능적인 무희, 2막에서는 자신을 배신한 애인 앞에서 비통함을 감춘 채 행복을 기원하는 춤을 추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련의 여인, 3막에서는 영혼이 돼 영원한 사랑을 지키는 신비한 망령으로 변신한다.
거짓으로 연기를 하면 스스로 어색하다는 김채리는 이로 인해 "내 숨어 있던 성격을 보게 된다"며 웃었다. "센 캐릭터를 맡으면 그날 종일 기분도 마음가짐도 강해진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렇다."
2막에서 니키아의 모습에 자신이 겹쳐진다.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음에까지 가게 되지만 스스로를 놓치 않는 자존심을 갖춘 당당함이다. "나 역시 사랑의 아픔을 겪어도 내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슬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표를 내지 않는다."
홍향기는 2막의 슬픔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음악만 들어도 슬프다. 아직도 니키아를 맡게 된 것이 믿기지 않는데도 이 장면 때문에 평소 생활 속에서도 암울하게 지내는 것 같다"고 몰입했다.
홍향기는 니키아의 캐릭터가 본래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는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저 투명하게 성격을 내보이면 쉬울 텐데 "니키아는 강한 모습도 있고 여리여리한 모습도 있고, 자존감도 있어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감자티에게 계속 눌리던 니키아가 참다 못한 감정을 폭발시킬 때의 모습이 나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놀라기도 했다"며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은 '절친'이다. 발레의 산실로 통하는 선화예술학교 선후배 사이다. 홍향기가 한 살 많은 선배지만, 유니버설발레단 입단은 김채리가 1년 빠르다.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도 2006, 2007년 연이어 입상하며 한국 발레의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입단(김채리 2009·홍향기 2010년) 후 큰 부상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것도 같다.
숱한 역경을 이겨낸만큼 행복하다. "춤을 추고 있다는 행복감"(김채리), "예방주사를 잘 맞아서 이제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레퍼토리에 출연하고 있어 기쁘다"(홍향기)고 입을 모았다.
둘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도 든든하다. 김채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서로를 응원해줄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한다. 같이 성장하고 있는 점이 좋다"며 홍향기를 따듯하게 바라봤다. 홍향기는 "채리가 입단 선배인 데다가 혼자서도 잘해서 내가 조언을 많이 받는다. 계속 선의의 경쟁을 해나가는 동시에 계속 대화를 하고 온전히 마음을 열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다만 "격려를 하나 하자면 아플 때 아프다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먼저 힘든 것을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다. 근데 언니가 먼저 이야기를 해주고 물어봐줘서 고맙다"(김채리), "나는 이것저것 먼저 더 말하는 성격이다. 성격이 반대여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 같다."(홍향기)
27일부터 11월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니키아 황혜민·강미선·김나은·김채리·홍향기, 솔로르 엄재용·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강민우·이동탁·김태석. 감자티 강미선(니키아 역도 소화)·최지원·예 페이페이·한상이. 예술감독 문훈숙, 지휘 미하일 그라노프스키, 협연 강남심포니 오케스트라. 러닝타임 2시간40분. 1만~12만원. 유니버설발레단. 070-7124-17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