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퍼포먼스 아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다. 기존의 극장 같은 전형적인 장소가 아닌 교회나 미술관, 박물관 그리고 주차장과 골목길 등이 무대가 됐다. '연극적인 것'인 것이 종료됐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1960년대 후반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환영에 대항하는 예술'이 이 같은 흐름을 축약했다.
윌슨은 17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콘템포러리 토크'에서 "하지만 나는 환영에 뭐가 문제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다시 프로시니엄(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액자 모양의 전형적인 극장 구조)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극도로 인공적인 연극 언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연극 언어를 만들면서 연극의 자연주의가 싫어졌다. "사람들이 관객 앞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설 수 있다고 생각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걷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분장을 해야 하는지 연습하고 배워야 하며 훈련받아야 한다. 조명, 무대를 알아야 하고 소품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한다."
당시 만연한 공연의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로부터 벗어나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나 협력했던 예술가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인 리처드 세라(76)는 길거리에서 그를 만나자 침을 뱉기도 했다.
그래도 윌슨은 꿋꿋했다. 7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연극을 만들었다.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호응을 얻자 24시간짜리 무음의 작품을 또 올렸다.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7일 동안 공연하는 작품도 선보였다.
23∼25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시즌프로그램 '아워마스터'의 하나로 선보이는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비교적 짧다. 러닝타임이 5시간 가량이다. 2시간 안팎의 공연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버겁다. 게다가 중간휴식 시간도 없다. 공연장을 드나들기를 원하는 관객은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현대 공연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윌슨의 작품이 처음 국내에서 선 보인 건 2000년 '바다의 여인'이다.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그의 작품은 이미지가 강조되는데 '해변의 아이슈타인'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가 1999년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작품'이기도 하다.
1976년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와 안무가 루신다 차일드가 협업한 작품이다.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이 소재이나 특별한 줄거리는 없다. 음악, 무용, 조명, 무대 디자인 등 연극의 구성 요소가 동등하게 맞서는 이미지 연극을 보여준다.
월슨은 "평화주의자인 아이슈타인이 전혀 의도치 않게 핵폭탄의 아버지가 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며 "제목처럼 해변에 서 있는 아인슈타인을 생각한 건 아니다. 이 제목이 주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을 만들고자 했다"고 전했다.
특정한 테마를 반복시키거나 확장시키는 글래스와 함께 이야기 대신 변주로 이뤄진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시각적인 주제가 있고 그것의 변주가 있고, 음악적인 주제가 있고 그것의 변주가 있는 작품 말이다. 음악은 숫자로 구조를 노래화하고자 했다. 숫자를 이용해 노래하는 것이 아인슈타인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 역시 음계 이름으로 부른다. '도레미~' 이렇게 말이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어두운 공간을 가로지르는 '빛의 기둥'이다. 단순한 조명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차가 그 뒤로 사라지는 걸 상상했다. 관객은 수직으로 볼 수 있는데, 연출은 하나의 선으로 볼 수 있다. 빛의 기둥은 관점의 차이를 상징한다."
상대성이론 등 아인슈타인의 모든 것이 빛에서 출발했다는 걸 감안했다. 아울러 오페라의 어원이 라틴어 오푸스(opus)에서 왔다는 것도 염두에 뒀다. 오푸스는 일, 작업 따위를 뜻한다. "오페라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오페라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작업이다."
윌슨은 이 작품이 만들어진 때는 컴퓨터가 없었는데 키보드를 치는 제스처가 이미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리며 "초연 이후 약 40년이 지난 지금 이 공연이 젊은 세대에게 어떤 맥락으로 가닿을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극이나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브로드웨이 작품을 볼 때 관객들의 반응을 스톱 워치를 통해 체크해봤는데 보통 2~3초에 한번씩 신호가 오더라. 이 작품에는 어떤 메시지도 없다. 아무 메시지가 없는 작품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건 사유와 생각에 대한 여지를 줄 수 있는 예술형식이라며 "아티스트로서 해야되는 건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햄릿' '메디아'처럼 많은 의미가 내포돼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을 강요하는 것은 불편하게 느낀다."
'2015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초청작으로 이날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베를린 앙상블의 '셰익스피어 소네트'도 윌슨의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중 '짝사랑의 고통, 인간의 필멸과 시(詩)의 영원성'에 대한 25편의 시를 무대화한 음악극이다. 영화 '물랑루즈' '아이 앰 샘'의 루퍼스 웨인라이트가 협업했다. 윌슨의 대표작이 비슷한 시기에 공연되는 건 이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