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마지막날인 15일 언론에 공개된 뮤지컬 '아리랑'은 뚝심이 돋보였다. 1막은 장면끼리 차지게 붙지 않고 이야기만 나열돼 거칠었는데 2막부터 뒷심을 받기 시작했다. 고선웅 식 재기발랄한 연출이 도드라지더니 그의 특유 장단을 찾았다.
◇고선웅·박명성의 뚝심
구한말에서 일제의 강점기를 배경으로 민초들의 수난을 다룬 작가 조정래의 동명 대하소설이 원작이다. '감골댁' 가족사 중심으로 2시간40분 짜리로 압축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의식 있는 양반인 '송수익', 그의 머슴이었다가 일제 앞잡이가 되는 '양치성'의 대립이 중심 축이다. '득보'와 '수국'의 사랑 이야기가 섞여들어간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1막과 2막 초반 자막으로 굵게 축약한다. 하지만 일제 강압에 못 이겨 만주로 떠나기까지 과정을 그린 1막은 겉만 핥는다는 인상이 짙다.
인물들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2막에서 리듬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고선웅 연출이 작품을 대변하는 정서로 내세운 '애이불비'(속으로는 슬프면서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체 하는 것)가 압축됐다.
수국과 득보가 일본 군의 총에 맞아 죽은 뒤 오히려 밝게 그려지는 명장면이다. 두 사람은 둘의 사랑 노래로 서정성이 짙은 '진달래와 사랑'을 낭만적으로 나눠 부르고 상여(喪輿)에 오르더니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진도아리랑을 신나게 부른다.
한이 신명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거대한 이야기의 힘에 밀려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뮤지컬의 리듬이 마침내 자리를 잡게 된다.
고선웅이 극으로 보여준 뒷심 못지 않게 프로듀서인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총감독의 뚝심도 느껴졌다. 제작기간 3년, 제작비 50억원이 들었는데 프로듀서의 결심이 아니면 성사될 수 없던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완성된 꼴로 무대에 올린 것만으로도 성취로 볼 수 있다.
◇명배우들의 호연
세세한 물줄기를 아우르는 역사를 몇 갈래로 압축하다보면 몇군데 이야기의 허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를 만회하는 건 배우들의 내공이었다.
우선 일제에게 온갖 치욕을 당하는 수국 역의 윤공주가 눈에 띄었다. 납득할 만한 이야기가 쌓일 시간이 없었음에도 득보와의 사랑을 '진달래 사랑'을 비롯해 '꽃이여' 등 몇 넘버를 통해 애절하게 표현했다. 마지막에 득보를 감싸 안고 일본군의 총알을 맞고 산화하며 비극을 완성한다.
내내 눈시울을 붉힌 득보 역의 이창희도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는데 두 사람은 다른 극중 인물들보다도 고선웅 식 연기를 체화했다. 몸짓과 소리는 과장됐으나 그 감정선은 절제하는 일종의 '애이불비' 식 연기인데 특히 상여 장면 앞뒤로 도드라졌다.
수난의 나날들을 이겨내는 '옥비' 역을 맡은 국립창극단의 히로인 이소연은 '신의 한수'였다. 송수익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캐릭터인데 나라와 그 사랑에 대한 한이 절정에 달할 때마다 뿜어져나오는 그녀의 소리는 인상적이다.
이와 함께 안재욱의 송수익은 과하지 않지만 카리스마가 깃든 호소력으로 극을 이끌어갔고 김우형의 양치성은 야비했지만 내면에 숨겨진 아픔도 놓치지 않았다. 김성녀의 감골댁은 존재감만으로도 극의 중심축을 단단히 붙잡았다.
무엇보다 실력이 탄탄한 앙상블이 전면에 나서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리랑'이 민초의 이야기인 만큼 농민들, 의병들의 합창곡이 많았는데 흐트러짐이 없었다. 특히 신아리랑을 머리를 바닥에 대고 숨죽여서 다같이 부르는 장면에서는 시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억눌림이 느껴졌다.
◇한국적 정서 찾는 넘버와 그에 대비되는 모던한 무대
가무악극 '화선 김홍도'(연출 손진책)로 이름을 알린 작곡가 김대성의 곡들은 한국적인 것, 민중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서양음악의 문법인 19인조 정통 오케스트라가 기반이지만 그 안에 전통적인 요소를 녹여냈다.
1막에서는 특히 민초들의 한을 대변하는 '풀이 눕는다'가 정점이었다. 시인 김수영의 대표 시 '풀'에 멜로디를 붙인 곡으로 등장인물들의 울분을 농축했다. 민중의 애달픔과 애국의 충정, 나라를 잃은 한 등이 뒤엉켜 드라마틱한 선율을 만들며 '대하 드라마' 기운을 내뿜었다. 특히 이소연의 천장을 뚫을 듯한 절창이 한을 승화시켰다.
1막의 마지막과 2막 초반에 울려퍼지는 '어떻게든'은 뮤지컬을 대표하는 웅장한 넘버이고 수국, 치성, 득보, 수익이 특정한 노랫말 없이 '아'라는 음성으로만 다른 음역대로 자신들의 울분을 토하는 '아의 아리아'도 인상적이었다. '진도아리랑'은 곳곳에서 변주되며 극의 테마를 만들어나갔다.
이와 함께 "~혀" "~재" 등의 사투리로 끝나는 넘버의 노랫말 어미는 정겨우면서 운율감이 느껴졌다.
반면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사이먼 코더 조명 디자이너, 고주원 영상 디자이너가 협업한 무대는 미니멀한 모던미를 살려냈다. 30여 배경을 LEC 스크린에 비쳐 만들어내는데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극의 정서에 방점을 찍는 게 묘책이다. 화려하고 촘촘한 LED에 비해 다소 성긴, 즉 반투명성의 장점이 있는 LEC스크린은 이 스크린이 설치된 앞뒤 공간감을 자유롭게 살리며 다양한 연출에 보탬이 됐다.
역시 신시컴퍼니가 제작한 뮤지컬 '고스트' 라이선스 공연에서 오토메이션 시스템으로 구현한 트레블레이터(평면으로 움직이는 보도)가 이번에도 사용돼 빠른 무대 전환을 돕는다.
◇총평
몇몇 빛나는 장면이 있음에도 초연인 만큼 아직 수작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뮤지컬 주요 관객층(20~30대 여성)에게 크게 호소력이 있을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광복 70주년을 맞은 해에 '아리랑'을 주제로 한국적 뮤지컬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 건 높이 살만하다. 신시컴퍼니는 2007년 6·25 동란을 배경으로 한 '댄싱 섀도우'(원작 차범석 '산불')를 제작했다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는데도 또 다시 한국적 소재의 카드를 꺼내는 모험을 했다.
무대 장르 중 상업성이 가장 짙은 뮤지컬에서 흥행 요소가 부족한 걸 뻔히 알고도 밀어붙인 추진력 역시 인정해야 한다. 종종 이야기가 비약하는 등 구성이 촘촘하지 못하고 성긴데도 순간 순간의 감정 전달이나 장면에 실리는 정서에 끌리는 뮤지컬이 있는데 '아리랑'이 그렇다. 관객들의 자연스런 공감이 무대의 공백을 보충할 수 있는 작품이다.
16일 정식 개막한다. 9월5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송수익 서범석·안재욱, 양치성 김우형·카이, 수국 윤공주·임혜영, 득보 이창희·김병희. 6만~13만원. 신시컴퍼니·LG아트센터. 02-2005-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