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은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법을 부린다. 객석에 앉아 있는 3시간 남짓만큼은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뮤지컬의 소임에 충실하다. '스카이', '사라', '네이슨', '아들레이드'로 대변되는 젊은 남녀의 고민과 갈등을 전한다. 사랑과 명예, 꿈을 걸고 벌이는 인생 승부를 다루지만 진지하기보다는 무엇보다 유쾌하다.
1950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래 2차례에 걸쳐 토니상을 9개나 휩쓴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의 교과서다. 국내에서는 1983년 극단 민중·대중·광장의 합동 공연으로 처음 선보인 이래 쇼뮤지컬 특유의 재치와 화려함을 주무기로 17번이나 리바이벌됐다.
진부해질 법도 하지만, 유럽풍의 비장미와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뮤지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최근 국내에서 선보이고 있는 어느 뮤지컬보다 대사가 많다. 송스루 뮤지컬에 비하면 연극 같이 느껴질 정도다. 이 때문에 대사가 쏟아지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인 스크루볼 코미디가 겹쳐진다.
어느 여자도 꼬드길 수 있는 전설의 도박꾼 스카이와 조신한 선교사 사라, 도박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결혼을 미루고 싶은 네이슨과 나이트클럽 핫박스 최고의 쇼걸이지만 결혼이 우선인 아들레이드. 서로 대비되는 남녀 커플의 티격태격과 사랑싸움은 노래와 춤이 만나면서 여느 스크루볼 코미디 영화보다 화학작용이 활발하다. 덕분에 캐릭터의 성격이 뚜렷하고 이야기의 전달력도 좋다.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뮤지컬배우 김다현(33)은 스카이를 제 옷 입은 듯 연기한다. 섹시한 이미지가 강한 이하늬(30)는 다소 가창력이 흔들리지만, 점점 뮤지컬배우의 틀을 잡아가는 모양새다.
'레베카' 등에서 주로 비장한 캐릭터를 연기한 신영숙(38)은 약혼 이후 14년째 결혼을 못하고 있는 노처녀를 쾌활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박준규(49)는 특유의 능청으로 넉살 좋은 네이슨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마치 해설자 같이 극 전개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찰떡궁합을 과시하는 '베니' 역의 임춘길(44), '나이슬리' 역의 김태한(36)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2층 높이의 무대에 브라스 밴드를 오픈 스테이지로 배치해 ‘보이는 음악’을 무대 디자인으로 연출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더했다.
1930~40년대 유행한 재즈를 연주하는 12인 브라스 밴드가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벗어나 무대 위 2층 구조물에 노출된 모습은 고전적인 풍미를 더한다. 스카이와 사라의 듀엣 '처음 느낀 감정', 도박꾼들의 역동적인 안무가 인상적인 '행운의 여신이여'도 그렇게 힘을 얻는다.
MBC TV '일밤-진짜 사나이'에서 긍정남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탤런트 류수영(34)이 스카이를 맡아 뮤지컬에 데뷔했다. 뮤지컬 '쓰릴미', MBC TV '오로라공주'로 주목 받은 탤런트 송원근(31)이 류수영, 김다현과 함께 스카이 역에 트리플 캐스팅됐다.
선교에 열성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선교사 사라는 이하늬와 함께 뮤지컬배우 겸 탤런트 김지우(30)가 번갈아 맡는다. 도박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네이슨은 탤런트 박준규와 뮤지컬배우 이율(29)이 나눠 맡는다. 최고의 쇼걸 아들레이드는 신영숙과 뮤지컬배우 구원영(34)이 연기한다. 같은 역을 맡은 박준규와 이율의 나이 차이가 큰만큼 이들의 출연 회차에 따라 비슷한 연배의 커플, 연상연하 커플로 설정이 바뀐다.
뮤지컬 '서편제'와 '광화문연가', '헤드윅' 등을 연출한 이지나(49)씨가 연출한다. 이씨는 예전 이 뮤지컬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1월 광림교회의 신축 건물에 들어선 1000석 규모의 BBC시어터 개막작이다. 로비가 7층, 객석이 8·9 층에 위치한만큼 극장 출입은 불편한 편이다. 공연 시간에 임박해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줄이 길어 계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압구정역에서 멀지는 않으나, 골목 사이에 있어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 배우들의 모습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사운드의 질감도 괜찮은 편이다. 객석 사이의 틈이 좁다는 것은 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