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미화 논란을 일으킨 미야자키 하야오(73) 감독의 ‘바람이 분다’가 3월2일(현지시간) LA 코닥극장에서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영상이 아름답다는 점에는 대개 동의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시비가 일었던 작품이다. 정계는 물론, 주인공이 담배를 너무 자주 피운다는 이유로 의사들에게까지 비판을 받았다. 미야자키 스스로도 일본의 국수주의와 아베 정권을 비난하는 글을 발표해 우파를 적으로 만들었다. 좌파들은 군용 전투기 디자이너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 강제 징용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이 살상무기를 만드는데 동원된 것을 도외시한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외면했다.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는 히로히토의 쇼와 시대(1926~1989)를 산 제로센 전투기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1903~1982)와 동시대 유명 소설가 호리 타츠오(1904~1953)를 합친 인물이다. 실존인물의 이름과 생애를 그대로 따온 뒤 호리 타츠오의 자전적 사소설 ‘바람이 분다’의 로맨스를 가미했다. 더구나 미야자키 아버지 가추지는 집안이 소유한 미야자키 항공사의 관리자로 일하며 제로센의 방향타를 제작했고, 군국주의 덕분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릴 적 꿈도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지난해 7월30일 일본에서 개봉한 이 애니메이션은 9월1일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됐고, 같은 달 5일 한국에서 도 개봉됐다. 독특한 판타지 세계를 창조해온 미야자키의 명성에 힘입어 여러 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지적이 나름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8월23일자에 도쿄 특파원 저스틴 매커리가 “세계2차대전 중 일본제국주의 해군에 의해 파괴적으로 쓰이던 미쓰비시 A6M 제로 전투기 개발자의 초상을 그려 분노를 사고 있다”고 영어권 독자들에게 보도했다. “진주만 공습과 가미카제(자살특공대) 전투기로 사용된 비행기를 만든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삼아 국내외 정치세력들의 타깃이 됐다”며 “한국 네티즌들이 ‘미야자키가 일본 군국주의의 잠재적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는 소식도 알렸다.
9월1일자에는 베니스영화제를 취재한 브룩스 기자가 “제로 전투기는 나중에 강제노역 수용소에서 만들어지고 가미카제 임무에 쓰였지만 영화는 그런 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지로는 비행기를 완성한 것으로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느끼고 있는 순수하고 무심한 남자로 덧칠됐다”는 리뷰를 남겼다.
같은 영어권에서도 미국으로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 비평가들과 기자들의 절찬을 받으며 현지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뉴욕 영화비평가모임, 뉴욕 여성영화언론인연합, 보스턴 온라인영화평론가협회, 시카고 영화평론가협회 등을 비롯해 지역별로 장편애니메이션상 1, 2위를 휩쓸다시피 했다. 난립한 매체와 단체의 수준도 의문시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으로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이 생긴 이듬해 이 상을 수상할 정도로 미국 영화계의 사랑을 받고 있긴 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자진사퇴하긴 했으나 아카데미상 애니메이터 투표인단에 뽑힐 정도로 편애를 받고 있다.
‘바람이 분다’가 1941년 미국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킨 하와이 진주만 기습에 사용된 전투기를 만든 이를 찬양, 미화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인들이 알고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최근 프랑스에서 열린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한국만화가들이 그린 위안부 만화 ‘지지않는 꽃’ 전시에 대한 주최 측의 태도와 비교된다. 프랑스 만화시장에서 ‘일본 망가’는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이 축제 운영비의 30%가량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한국의 평화 기획전을 취소시키려는 영향력을 행사하려다 실패했다. 조직위는 위안부 실상을 왜곡한 작품을 전시한 일본 부스를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제국주의 침략 과거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본인들의 무지 내지 무관심에는 세계적인 거장도 예외가 없는 듯하다. 몇 번이나 은퇴의사를 번복한 미야자키는 “은퇴작이 노미네이트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후보작으로 올려준 아카데미 회원들과 성공으로 이끌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 작품을 봐주면 기쁘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미국 애니메이션계의 원조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월트디즈니스튜디오모션픽처스가 터치스톤 레이블을 달고 북미지역 배급을 맡고 있다는 것도 이번 후보 선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미국 개봉은 아카데미를 10여일 앞둔 21일인데, 디즈니는 지난해 11월 1주간 뉴욕과 LA지역을 순회상영하는 기회를 가졌다. 아카데미상을 고려해 후보자격을 갖추기 위한 방편이었다. 당시에는 일본어판을 자막을 달아 상영했고, 본격 개봉 시에는 영어 더빙판을 건다. 유대계 배우 조셉 고든 레빗(33)이 호리코시 지로 역의 목소리를 맡았다. 비록 엄격한 유대교 방식을 지키는 집안에서 자라지는 않았다지만,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핍박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일본의 만행을 알고도 이 역할을 맡을 수 있었을지 의문시 된다.
미국 현지에서도 ‘바람의 분다’가 가진 전쟁미화를 꼬집는 목소리가 있긴 하다. 한국계 등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많은 LA와 뉴욕의 몇몇 언론들만이 이 같은 시각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LA위클리는 해외 영화들을 소개하며 “최근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은퇴선언을 또 번복하긴 했지만 크게 사랑받아온 이 감독의 스완송(백조가 죽을 때 부른다는 아름다운 노래) ‘바람이 분다’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데 일조한 일본의 항공사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미심쩍은 숨은 의미를 고려할 때 단순히 감동을 느낄 수만은 없다”고 꼬집었다. 짧은 언급이나 이 글은 유명 영화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톱크리틱으로 꼽히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바람이 분다’가 과연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지를 논했다. 1주간의 짧은 개봉이 아카데미상 후보가 되는데 적합한 기준인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관련자들은 인터뷰를 거부하거나 조심스러운 입장이라고 전했다. 디즈니와 미야자키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16년째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며 이것이 아카데미상 진입을 용이하게 했고,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흥행에 엄청난 이득이라고 간파했다. 이 작품이 가진 메시지에 대해서는 영국 신문 가디언이 가진 입장과 나란히 했다.
한편 올해 아카데미상 장편애니메이션부문 후보로는 ‘바람이 분다’ 외에 ‘크루즈 패밀리’, ‘겨울왕국’, ‘슈퍼배드2’ 등 할리우드 작품들과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이 올라있다. 재패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일부 미국 팬들은 벌써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 아카데미상을 또 수상할 지를 놓고 설레발치고 있다. 노감독의 은퇴작이라니 미야자키의 일생에 걸친 공적을 기려야하겠다는 선입견도 작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술작품이 국경을 넘으면 또 다른 문화적 해석과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성이라는 것이 과연 창작자가 가진 사상의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다 가늠하지 못한 채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미국에 묻고 싶다. 국력과 문화가 가진 힘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