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그랬죠. ‘국민 불륜배우’에서 ‘불륜’만 떼고 싶다고요.”
SBS 공채 탤런트 출신 민지영(35)에게 KBS 2TV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은 고향이다. 20대 꽃다운 나이 때부터, 선배 연기자들의 극중 배우자를 유혹하는 ‘꽃뱀’ ‘가정파탄녀’로 꾸준히 출연해왔다.
지난해 8월부터 종합편성채널 JTBC 일일드라마 ‘더 이상은 못 참아’에 출연하면서도 금요일 밤 11시가 되면 KBS 2TV에 채널을 고정하고 모니터링했다. ‘사랑과 전쟁’의 대표로 JTBC에 왔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연기했고, 호평을 끌어냈다. 이 와중에 ‘사랑과 전쟁’에 카메오로 출연, 의리도 지켰다.
‘사랑과 전쟁’은 동시에 ‘떠나고 싶은 고향’이기도 했다. “‘사랑과 전쟁’ 시즌 1이 끝나기 1년 전에 하차했어요. 민지영이라는 배우가 ‘사랑과 전쟁’에서만 연기한다는 게 힘들었거든요. SBS TV ‘쩐의 전쟁’ 번외편에 출연했는데 ‘박신양이 왜 ’사랑과 전쟁‘에 나오느냐’는 말도 들었어요. 상처가 많았죠.”
소속사도 없이 알음알음으로 방송에 간간히 얼굴을 내비쳤지만 슬럼프였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감옥에 수감된 것 같았어요. 우울증 같은 게 왔죠.”
스스로 찾아 입은 옷에 관심을 보이던 팬들이 떠올랐다. 인터넷 쇼핑몰을 열고 옷을 팔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았고 피팅모델로도 나섰다.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과 전쟁’에서 탈출한 것 같은 해방감은 잠깐이었다.
“배우 민지영이 사라지고 있더라고요. 점점 장사꾼이 돼 가는 모습을 발견했죠.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일했어요. 배우가 피부가 상하는 걸 생각도 안 하고 말이에요.”
2009년 겨울, 졸린 눈을 비비며 SBS TV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촬영 현장을 찾다 사단이 났다. 빙판길에 운전 중이던 차가 미끄러졌다. 차는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달려온 길을 바라본 채 멈췄다. 마주 오는 차들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반파된 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다. 외상은 없었지만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급하게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사랑의 인사를 전했다.
구급차를 부르기 전에 얼굴부터 확인했던 그녀다. 교통사고 후 “인생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다”는 아버지의 말에 손해를 감수하고 쇼핑몰을 접었다. 병원에 누워 지난날을 수 없이 되짚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플루트를 불다가 사람들에게 연기로 감동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연기자의 길을 걸었어요. 예전을 되돌아보니 다시 시작하면 될 것 같았어요.”
데뷔 10년, 걸어왔던 길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걷기로 했다. 대학로를 찾아 3편의 공연을 했다. 역할도, 보수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약속만 생각했다. “1년 후에 대학로 무대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결국 약속한 날을 지켰죠.” SBS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방송 복귀작이다. 눈에 띄지 않는 단역, 주모를 연기했지만 기뻤다.
“‘뿌리 깊은 나무’에 출연하고 있을 때 ‘사랑과 전쟁’ 시즌2가 시작된다고 러브콜이 왔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상대 배우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물세례를 맞던 날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역할을 따지고 망설인다는 것 자체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에서든 열심히만 하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죠. ‘사랑과 전쟁 소속배우’가 아니라 배우 민지영이 ‘사랑과 전쟁’에 출연해서 감동을 주자고 마음먹었어요. ‘배우 민지영과 싸우자’는 각오였어요.”
‘아들을 위해 내림굿을 받는 엄마’ ‘알코올 중독자 아내’를 연기하며 연기의 폭을 넓혔다. “스스로 작품을 끝내고 나면 희열을 느낄만큼 공부한 기분”이다. 하지만 ‘사랑과 전쟁’ 시즌2가 100회를 맞이하는 지금도 ‘불륜배우’라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았다. 결혼, 연애도 미루고 ‘부부관계’ ‘가족 간의 갈등’을 연기하다 혼기도 찼다.
“예전에는 그랬죠. ‘국민 불륜배우’에서 ‘불륜’만 떼고 싶다고요. 그런데 뭐 국민배우는 아무나 하나요? (웃음) 지금은 연기하고 있는 순간, 캐릭터에 몰입해서 연기하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