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무력한 아버지와 딸, 창극 '아비. 방연'

  • 등록 2015.11.27 15: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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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사건에 휩쓸린 신랑 '송석동'의 죽음에 '소사'의 연지곤지가 붉은 피가 돼 흐른다. 딸의 슬픔을 지켜본 아비 '왕방연'의 눈물은 마를 틈이 없다. 2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창극단 창극 '아비. 방연'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내내 코를 훌쩍거렸다.

공연 콤비인 작가 한아름·연출 서재형 부부의 두 번째 창극 '아비. 방연'에서는 선택의 문제에 한이 파고들어가는 솜씨가 제대로 발휘된다. 주군 대신 자식을 택하는 방연의 결정은, 관객의 감정선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수(匕首) 겸 비수(悲愁)다. 

조선 초기 계유정난이 배경이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주인공이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낼 때 그를 호송했다. 유배 중이던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았던 실존인물이다. 하지만 어떤 역사서에도 그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한 작가는 그를 둘러싼 새 이야기를 직조해냈다. 단종의 충직한 신하였던 왕방연이 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주군을 저버리게 되는 비극으로 풀어낸다. 평생 한 번의 어긋남 없이 강직하게 살아왔으나 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념을 꺾어야만 하는 아버지.

수양대군을 주군으로 모시는 한명회와 봉석주가 송석동과 혼례는 치렀으나 초야를 치르지 못한 그의 딸을 공신에게 노비로 바치려 한다. 왕방연은 주군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현대의 소시민적 삶과 통한다. 영화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는 돈이 없어도 '가오'는 있지만,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돈도 명예도 짊어지고 가기 힘들다. 왕방연이 "난세의 영웅보다 아비로 살리라"며 자신을 욕하라고 해도 욕하기는커녕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비와 소시민의 애환을 떠안은 방연의 운명은 바람 앞, 파도 앞에 놓인 것 같다. 그러니 계속 달리고 달릴 수밖에 없다. 딸에게 탈이 일어나기 전에 달리고 또 달린다. 작은 무대 위에서는 원을 그리며 계속 도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삶에 쫓기는 수레바퀴 같은 삶을 사는 현대인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도 하다. 서 연출이 이끄는 극단 이름도 '죽도록달린다'다. 

서 연출과 한 작가는 피바다와 비극을 몰고 온 수양대군의 인간적 면도 그린다. 영월에서 단종에게 사약을 건넌 뒤 한양으로 죽도록 달려오지만 이미 봉석주가 소서를 범했다. 그는 소서를 업고 또 걷고 또 걷는다. 수양대군은 방연을 아무도 찾지 말라고 절규한다. 인물이 있었다는 극도록 짧은 역사적 텍스트에 이성적, 감성적인 요소를 모두 담아 심장처럼 펄떡거리게 한 한 작가의 공력을 높이 살 만하다. 

작품의 해설자인자 여러 배역의 대변인인 '도창' 김금미는 극에 연민을 불어넣고 그 연민의 주인공인 최호성은 커튼콜 때 눈시울을 붉혔다. 소사 역의 박지현은 만12세인데, 무대 위에서 방연의 딸 그 자체였다. 

국립창극단 여단원인 민은경이 단종 역을 맡아 섬세한 내면을 선보이고 수양대군 역의 이광복은 카리스마와 고뇌를 동시에 떠안은 수양대군을 맞춤옷처럼 입었다. 

서·한 콤비의 첫번째 창극으로 잔인하면서도 절절할 수밖에 없었던 모성을 다룬 창극 '메디아'와 훌륭한 짝패를 이루는 '부모 시리즈'가 나왔다.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이들에게 창극의 창은, 극의 또 다른 장르가 아니라 애절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통로다. '메디아'의 모성을 연기한 박애리가 첫 작창을 맡아 애끓음의 농도를 짙게 했다. 

모진 부성애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 이어 부성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12월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러닝타임 100분. 2만~5만원. 국립극장. 02-2280-4114


정춘옥 kimm1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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