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극단이 가을마당 네 번째 작품으로 선보이는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정영' 역을 맡은 배우 하성광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정영의 처를 연기하는 이지현은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영에게 침을 뱉으며 "그 약속이 뭐라고. 그 의리가 뭐라고. 그 뱉은 말이 뭐라고"라며 울부짖는다.
26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연습실에서는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연신 눈물을 훔치느라 진땀을 뺐다.
특히 고선웅 연출은 끊임없이 갑티슈에서 휴지를 빼들어 눈밑을 닦았고,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하릴없이 배우들을 쳐다봤다.
연극 '칼로막베스'와 '홍도', 뮤지컬 '아리랑' 등으로 각색의 귀재로 정평이 난 고선웅이 중국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조씨고아(趙氏孤兒)'를 각색·연출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중국 원나라 때의 작가 기군상이 연극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조씨 가문 300명이 멸족되는 재앙 속에서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삭의 아들 '조씨고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희생하게 되는 비운의 필부 정영이 중심축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희생 끝에 살아남은 조씨고아를 자신의 자식이자 권력을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도안고'의 양자로 키우며 20년 동안 복수의 씨앗으로 길러낸다. 도안고가 조씨 가문을 없앤 장본인이다.
정영은 복수의 씨앗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씨앗을 버린다. 공주와 조씨고아를 살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아기를 자신의 친아들과 바꿔친다. 이를 목격한 정영의 처는 한없이 주저않는다.
고선웅식 연출 정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속으로는 슬프면서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체 하는 것.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 시어머니와 시누이로 인해 끊임없이 억울한 상황에 처하는 홍도를 다룬 연극 '홍도', 일제강점기의 민초들의 삶을 다룬 뮤지컬 '아리랑'이 그랬다.
정영도 이 정서를 몸소 체화한다. 도안고가 조씨고아인줄 알고 바닥에 3번씩이나 패대기치는, 자신의 아들을 바로 앞에서 보면서도 막지도 심지어 울지도 못한다.
도안고가 자신에게 조씨고아를 바쳤다고 여기는 그를 "이제 내 사람"이라며 "기쁘지 않은가. 웃어라"라고 할 때 웃는 정영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아이러니함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의상과 무대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연습 장면만으로도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데, 본공연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막막하다. 앞서 국립극단의 또 다른 연극 '리어왕'에서 미친 리어로 광기를 발휘한 장두이는, 이번에 권력에 미친 도안고로 또 다시 광인이 됐다.
웃음기가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정서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라 고선웅 작품의 또 다른 장기인 웃음은 쏙 빠진다. 고선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조씨고아'는 원나라의 대표 연극 형식인 '잡극(雜劇)'이다. 가극 형태로 무대 장치는 간단한 소도구뿐이다. 막을 사용하지 않았고 상황 설정은 모두 곡(曲·노래), 백(白·대사), 과(科·행동)로 나타낸다.
공연 중 암전이 거의 없이 장면 전환이 관객에게 그대로 노출되고, 동양 전통 연극에 흔히 나오는 검은 부채를 든 '묵자(墨子)'가 인물의 퇴장과 소품의 이동을 진행한다. '이영녀' '리어왕' '문제적 인간 연산' '아버지와 아들' 등 국립극장 무대를 도맡은 무대 디자이너 이태섭이 빈 무대에 도전한다.
연극 내내 눈물을 쏙 뺄 관객은, 복수 끝에 찾아오는 씁쓸한 공허까지 느낄 때 비어 있는 무대처럼 한없이 망연자실한 기분에 사로잡힐 듯하다. 고선웅은 "이야기만 자체만으로도 극이 꽉 차 무대를 비웠다"고 말했다.
11월 4~22일 명동예술극장. 도안고 장두이, 정영 하성광, 공손저구 임홍식, 영공 이영석, 조순 유순웅, 제미명 조연호, 정영의 처 이지현 등. 원작 기군상, 번역 오수경, 조명 류백희, 무술 한지빈. 러닝타임 140분(휴식 15분 포함).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