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리뷰]장진 감독, 기대이하 연출력…뮤지컬 '디셈버'

연예뉴스팀 기자  2013.12.23 08:16:03

기사프린트

영화 '킬러들의 수다'(2001)에서 킬러(신현준)는 어느 남성의 왼손을 못 쓰게 만들어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운전자가 왼손으로 요금을 건넬 수밖에 없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소 직원으로 변장한 킬러는 운전자의 왼손에 잔돈과 함께 폭발물을 쥐어줄 계획을 세웠다.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되려는 찰나, 오른손으로 휴대폰 통화 중이던 운전자는 왼손으로 전화기를 옮기고 잔돈을 받기 위해 반대쪽 손을 내민다. 작전은 무산되고 운전자는 유유히 떠난다.

이야기꾼 장진(42)의 재능은 독특한 리듬이 기반이다. 유머가 추동력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유머가 발생하고, 그로 인한 리듬으로 이야기가 탄력을 받는다. 영화 '아는여자'(2004)에서 시한부 삶 선고를 받은 '치성'(정재영)이 자살하기 위해 참가한 마라톤에서 김치 냉장고를 사은품으로 받아오는 식이다. '킬러들의 수다'와 '아는여자'를 통해 다소 말투가 느린 원빈(36)과 이나영(34)의 독특한 리듬 연기 패턴을 발견한 주인공도 장진이다.

그가 이끄는 영화기획사 '필름잇수다'의 이름에서 엿보이듯 장진의 작품에는 수다가 많다. 하지만 단순히 말만 많은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한 유머와 말장난은 극을 환기시키며 독특한 리듬을 부여한다. 장진의 뮤지컬 데뷔작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는 그의 이런 특기가 다소 삐거덕거린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차지게 붙지 않는다. 영화의 편집과 장진의 본래 기반인 연극의 관객 화답은 그의 리듬에 맞장구 역을 한다. 그러나 대극장 뮤지컬에서는 이 두가지를 기대하지 못한다.

특히 대형 뮤지컬은 아이러니를 기다려주는 작품이 아니다. 긴장이 고조된 감정의 호흡을 유머로 흩트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순간 극의 리듬이 깨어진다. 영화가 원심력이라면, 뮤지컬은 구심력이다. 감독보다는 배우의 예술인 무대, 특히 뮤지컬에서는 배우로 힘이 집중해야 하는데 아이러니한 상황은 연출가를 계속 상기시킨다.

깨어진 틈을 영화에서는 편집과 관객의 반응이 메워주지만, 뮤지컬에서는 노래로 채워야 한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디셈버'는 김광석의 곡들이 주축이 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그가 부른 18곡과 자작곡 4곡, 미발표곡 '다시 돌아온 그대'(작사·곡 김광석)·'12월'(작사 조현주·작곡 김광석) 등 총 24곡을 녹여낸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무려 170분에 달한다. 그것도 첫날 공연에서 30분을 덜어낸 것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남자주인공 '지욱'이 대학생 때 만난 첫사랑 '한이연'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연과 닮은 '유화이'를 만나 다시 새 사랑을 시작한다. 하지만 첫사랑은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1막은 대학생 운동이 절정이던 1992년, 2막은 20년이 흐른 현재다.

단순한 이야기에 비해 긴 러닝타임을 메우는 건 자잘한 유머들이다. 무대 전환을 위한 장치라는 점도 이해하나 곁가지가 많다. 영화라면 편집의 힘을 빌려 리듬을 부여할텐데 뮤지컬은 암전을 묵묵하게 기다려야 한다. 유머 코드는 아니지만 지욱의 친구 '최훈'의 부모 이야기는 사족에 가깝다. 극의 흐름과 크게 관련 없는 이 부분은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사용하기 위한 장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김광석의 몇몇 곡들을 극에 녹여내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하다. 화장실에서 오래 볼일 보는 장면에서 '일어나'가 흘러나오고, '서른 즈음에'를 부르기 위해 나이를 굳이 끄집어낸다. 극에서 웃음 코드를 담당하는 '성태'가 부르는 이 곡은 끝까지 유머를 위해 사용된다. 아련함이 특징인 '서른즈음에'를 기대했을 관객이 무안해진다. '멀어져간다'라는 노랫말에서 건물들이 실제 멀어지는 식이다. 고인의 노래이고 그에게 헌정하는 뮤지컬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유머에도 곡의 분위기에 맞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홀로그램 기술과 미디어파사드 기술을 접목, 무대 위에서 김광석을 재현하는 점도 큰 기대를 모았는데 첫날에만 시도되고 이후 공연에는 취소됐다. 앞서 김광석 노래로 만든 또 다른 주크박스 뮤지컬인 장유정 연출의 '그날들'에 비해 '디셈버'의 강점은 유명인의 초상 등을 선전에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권리인 '퍼블리시티권' 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날들'은 이 권리가 없어 김광석의 초상권은 물론 그의 이름도 사용하지 못했다. '디셈버'는 기술과 맥락 문제로 자신의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추후라도 김광석의 홀로그램을 사용하겠다는 입장이나, 요원하다. 이에 따라 홀로그램으로 등장할 김광석과 지욱이 듀엣으로 부를 예정이던 노래 '먼지가 되어'는 커튼콜 곡으로 대체됐다. 극에 등장하지 않은 곡이 커튼콜에만 나오는 점도 낯설다.

기대가 컸던만큼 비판이 앞서지만, 단점뿐인 뮤지컬은 아니다. 혹자는 '강남뮤지컬'이 아닌 '강북뮤지컬'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뮤지컬에 다소 낯선 관객이 즐길 유머 코드가 많다는 것이다. 뮤직드라마 느낌이라 송스루 뮤지컬이 낯선 관객이 접근하기에는 수월하다. 영화처럼 군중 장면을 배경으로 활용하는 신이 많다. 세종문화회관의 광활한 무대를 채우는데 안성맞춤 연출이다. 턴테이블 무대를 통해 배경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색다른 매력을 끄집어냈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공연연출가인 지욱을 맡은 뮤지컬 블루칩 김준수(26)는 역시 제 몫을 한다. 김광석의 애틋한 곡들은 김준수의 쇳소리가 섞인 애절한 목소리를 만나 새 생명력을 얻는다.

주로 송스루 뮤지컬에 출연한 그가 연기하는 장면이 많은데 귀여운 척 하는 장면에서 다소 어색해하는 것 말고는 제법이다. 특히 화이가 자신이 이연을 닮아서 주연 배우로 선발한 것이냐고 지욱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맞받아치는 감정의 팽팽함도 상당하다. 드라마가 너무 많아 지루해질 위험이 있는 극에 열정적인 리듬을 부여한다. 지욱 역으로 더블캐스팅된 박건형(36)은 안정된 연기력으로 절제된 감정을 보여준다. 화이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김준수처럼 화로 받아치는 것이 아닌 삼키는 것이 예다.

이연과 화이, 1인2역의 김예원(26)은 새 발견이라 할 만하다. 뮤지컬이 이번이 처음임에도 상당한 가창력을 선보인다. 진중한 매력의 이연과 발랄한 화이를 어색함 없이 연기한다. 필름잇수다 소속인 그녀는 처음 주연급에 캐스팅될 때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실력과 매력으로 이를 불식시킨다. 같은 역의 오소연(28)은 역시 실력파답게 가창이 수준급이다. 연령대와 화확작용을 볼 때 김준수와 김예원, 박건형과 오소연이 호흡을 맞출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

장진의 어느 작품에서처럼 '디셈버'에도 여자주인공 이름이 이연과 화이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뮤즈와 같다. 이를 뮤지컬에서도 사용한 건 이 장르에서도 자신의 인장을 새기고 싶어 하는 욕심처럼 보인다. 성공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그의 아이러니한 유머 코드를 뮤지컬 문법에 적용하는 것은 아직 어색하다. 더 압축하고 과감히 잘라내면, 러닝타임이 20~30분 줄어들고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노래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뮤지컬의 매력 중 하나는 압축미다.

장진 연출·김준수의 네 번째 뮤지컬 출연작이라는 점과 함께 '디셈버'로 관심이 쏠린 이유 중 하나는 제작사다. 영화 '7번방의 선물' '변호인' 등을 배급하며 올해 영화계의 큰손 CJ E&M를 제친 영화 투자·배급사 NEW의 계열사 쇼&뉴가 처음 제작하는 뮤지컬이다. 뉴는 초반 호의적의지 않은 반응에 다소 당황한 듯하다. 가장 큰 실수는 프리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작품성을 검증받은 라이선스 작품이라도 수정할 수 있는 프리뷰라는 유예기간을 둔다. 화요일에 개막하는 기존 뮤지컬과 달리 월요일에 첫 공연하는 신선함은 좋았으나 공연 내내 매일 고쳐나간다는 건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창작뮤지컬 작업은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디셈버'는 보여줬다. 장진은 20일 프레스콜에서 여러 의견을 참조해서 계속 수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와 다른 뮤지컬의 매력이다. 별점 반개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창작뮤지컬 작업의 노고에 대한 격려다.

2014년 1월29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볼 수 있다. 뮤지컬배우 김슬기(22) 이창용(29) 박호산(41) 등이 출연한다. 5만~14만원. 1544-1555

장진의 시행착오, 김준수의 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