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간난하고 외로웠던 그 시절(1960~70년대)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가락이 있었다. '뜰 앞의 추초(秋草)도, 벌레 소리도, 인제는 다 지어서 쓸쓸하고나. 아 백국화야, 아 백국화야, 너 홀로 남아서 정답게 피었고나'였다. 이 노래가 스코틀랜드의 민요 '더 라스트 로즈 오브 서머'(The Last Rose of Summer·한떨기 장미꽃)'라는 사실은 훨씬 뒤에 알았다. 진한 향수와 더불어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고독이 그 노래에 묻어 내 둘레를 감쌌다. 이를 계기로 중학교 1학년 때 배운 노래가 꼬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그런 노래들이 내 클래식 음악 입문의 계기가 됐다."
지난 1일 급성 폐렴으로 별세한 클래식음악 평론가 우당(愚堂) 안동림(82) 전 청주대 영문학과 교수는 유작 '내 마음의 아리아'(2011·현암사)의 머리말에서 클래식음악에 대한 애틋함을 밝혔다.
고향을 잃고 사는 인간에게 갖가지 성악곡은 가슴을 저미는 절실한 향수(鄕愁)의 노래가 됐다면서 "온갖 삶의 애환(哀歡)을 가슴 저리게 노래한 오페라 아리아는 더욱더 지병(持病)처럼 내 가슴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불러도 소리쳐도 안 오는 이를, 기다리다 시드는 헛된 물망초, 심은 사람 어디서 저 달을 보랴' 읊조리던 음악 선생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고 전했다.
'클래식음악의 교과서'로 통하는 '이 한 장의 명반' 시리즈의 저자인 안동림은 누군가에게 '절실한 향수'와 '지병'처럼 마음 속에 남게 됐다.
음악평론가, 나아가 음악애호가인 고인은 영문학자이자 고전번역가, 소설가, 출판기획자, 기자로 활동한 전방위 문화인이었다.
1932년 평남 평원군 숙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학교 시절 음악을 접했다. 6·25 동란 당시 약관의 나이에 단신으로 남쪽으로 피란을 왔다.
'이 한 장의 명반' 시리즈을 비롯해 오래기간 고인의 책을 펴낸 현암사의 김수한 편집주간은 "60년이 넘도록 타향살이를 하면서 고인의 향수와 고독을 달래준 것은 음악과 책(고전)이었다"면서 "종종 '우리 시대의 마지막 르네상스인'으로 불리기도 한 고인은 영문학이 주전공이었지만, 수업 시간에 한시를 읊고 음악 연주를 듣는 등 범주가 넓은 교양인이었다"고 추모했다.
1950년대에 소설가로 등단했고 1960년대에는 신문 기자와 번역가, 출판 기획자로 활동했다. 1970년대부터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동양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고 음악 에세이를 썼다.
특히 출간 이래 20여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을 비롯해 '이 한 장의 명반 오페라', 1970년대 후반에 집필한 '불멸의 지휘자'와 '내 마음의 아리아' 등으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꾀했다. 수많은 후배 음악애호가들의 멘토 역을 해왔다.
김 편집주간은 "우리 문화사의 중요한 '기억의 장소'이자 꾸준히 문화를 살피고 글을 쓰는 '영원한 현역 작가'였다"면서 "팔순이 넘어서 새로 집필을 시작한 '당시 감상'은 아쉽게 끝을 맺지 못하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인이 가장 좋아한 음악가는 모차르트다. 김 편집주간은 "꾸밈없이 흐르는 유현한 음악이 노장의 세계와 가장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8세기 중국의 문인 장판교가 남긴 '난득호도'(難得糊塗·어리석기가 더 어렵다)를 삶의 지침으로 삼아, 허명을 거부하고 무진한 호기심을 따라 생을 즐겼던 고인의 전인적인 지적 편력은 가볍고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자기를 찾아가는 순례가 아니었나 짐작한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장자 전문가로도 유명했다. 국내 최초로 전편 완역한 '장자'와 불교의 진수를 보여주는 화두집 '벽암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장자'는 교수신문이 최고의 번역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족과 현암사 등 출판사,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워너뮤직코리아 등 음반사 관계자들은 조만간 고인의 기억을 나누고 추모하는 작은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박종명 워너뮤직코리아 클래식&재즈음반마케팅부 부장은 "'이 한장의 명반'은 우리나라에 클래식을 알린 최초의 개론서가 아닐까 한다"면서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애도했다.
클래식 관계자는 고인이 '월든'으로 유명한 생태주의자 겸 자연주의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를 좋아한 사실을 특기하며 "소박했다"고 기억했다.
유족은 고인의 부고도 내지 않았다. "유지를 받든 유족 측의 요청으로, 뒤늦게 알려드린다"면서 10일 오후 부고를 전한 현암사는 "평소 '번거롭지 않게, 소박하나 따뜻하게' 후사를 당부하신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렀으며, 분당메모리얼파크 가족묘에 안장했다"고 밝혔다.
종이함 유골에 담아 일체의 장식 없는 묘를 써달라는 유지에 따라 고인의 묘 앞에는 화엄경의 글귀인 '무거무래(無去無來)'가 새겨진 작은 검은색 비석만 놓을 예정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는 뜻이다.